[윤태옥의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네이멍구 알선동
독특한 모양도 많다. 오이풀은 벌레의 꼬치가 시커멓게 말라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알갱이 하나하나가 꽃으로 피어난다. 그렇게 나온 오이풀의 주홍색 꽃잎은 작지만 찬란하다. 쉬땅나무는 일부만 꽃잎을 열고 있으면 아직 열리지 않은 꽃망울과 이중창을 하는 느낌이다. 두메부추도 쉬땅나무 꽃과 비슷해서 하얀 횃불 모양이다. 200여m밖에 되지 않는 길을 걸으면서 내 눈에 담긴 야생화들이다. 그야말로 야생화 천지다.
대흥안령 산속의 알선동 가는 길
솔체꽃·개미취·오이풀 등 흐드러져
남천 두 차례, 드라마보다 더 극적
북주·수·당 세 왕조 ‘한통속 집안’
독고신의 세 딸은 각각 황후 올라
마오쩌둥 대장정도 변방서 시작
북위 세워 북중국 통일하고 호한 융합
내가 알선동을 처음 찾은 것은 2010년 8월 하순, 자작나무 잎사귀가 이미 노랗게 물들어 가는 계절이었다. 베이징에서 탄 기차에서 26시간을 앉아서 버티고, 씰룩씰룩거리고 쿵쾅쿵쾅대는 시외버스를 2시간여 견디고, 다시 허접한 시골 무면허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와서야 동굴 앞에 설 수 있었다. 나를 긴 여정을 감수하고도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이란, 박한제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역사기행서다.
범상치 않은 제목에 선비족 탁발부의 천년 역사가 응축돼 있다. 대흥안령 깊은 산속의 알선동 일대에서 살다가, 지금의 후룬베이얼 초원으로 일차 남천을 했다. 이곳에서 몸집을 키워서는 흉노고지까지 이차 남천을 하여 북위(北魏)를 세워 북중국을 통일했고, 호한(胡漢)을 융합하는 거대한 변혁을 이끌었고, 종국에는 대당제국에 이르는 대서사시다.
북위(16국)-서위(동위)-북주(북제)-수의 통일(남조)-대당제국으로 이어지는 왕조 교체가 복잡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정치적으로 북주·수·당 세 왕조는 ‘한통속 세 집안’이었던 것이다.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를 중심으로, 북위 무천진(武川鎭, 지금의 후허하오터시 무천구) 출신들이 탁발선비라는 울타리 안에서 결집(관롱집단)했다가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며 정권을 탈취한 것이다. 수문제 양견과 당고조 이연 모두 관롱집단 출신이다. 이들이 한통속이란 것은 그들 사이의 혼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수나라는 북주의 사돈이고, 당나라는 북주의 사위다. 혼맥의 중심에는 독고신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의 세 딸은 각각 북주·수·당의 황후가 되었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알선동에서 시작된 두 번의 남천 역시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알선동 일대의 삼림 지대에서 살아오던 탁발선비는 기원전 1세기께 1차 남천을 했다. 서쪽으로 대흥안령을 넘었고 어얼구나강(아르군강, 현재 중국·러시아의 국경 하천)을 만나 남하하여 후룬호(呼倫湖) 일대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초원에 적응하며 힘을 키운 탁발선비는 3세기 초(2세기 중엽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서남으로 멀고 먼 2차 남천을 했다. 몇 번의 위기를 넘나들다가 탁발의로가 대국(代國 310~376년)을 세웠다.
변방은 다음 시대의 황제 배태한 곳
대국은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주저앉기도 했으나,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東晉)에 패하면서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탁발의로의 손자 탁발규 도무제는 386년 북위를 세우고 평성(平城, 지금의 산시성 다퉁 大同)으로 천도하여 평성시대를 열었다. 3대 황제인 탁발도 태무제는 북중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4대 문성제, 5대 헌문제, 6대 효문제까지 급진적인 호한융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관원들은 한족 복장을 착용하게 했고, 궁정에서는 선비어가 아닌 한어를 사용케 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전통적인 복성을 한족 방식의 단성으로 바꾸게 했다. 황제가 앞장서서 탁발씨를 원(元)씨로 개성했다. 호한융합의 하이라이트는 평성에서 낙양으로의 천도였다.
거란이 말 위에서의 정복자로 군림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그렇게 세계제국을 이루었고, 만주족은 동아시아 최대판도의 대청제국을 구가했다. 마오쩌둥이 권력을 쥔 것도 대장정, 곧 변방에서 변방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도주로에서였다. 변방의 작은 야생화들이 내 좁은 소견에 새삼 찬란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역사를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묘한 것은 그곳의 야생화들 대부분은 위도 차이가 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