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97)
지인의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났단다. 전생에 억겁의 복을 짓고 덕을 쌓아야 받을 수 있다는 ‘주말부부’라는 티켓을 어떻게 아껴 쓸지 미리 너스레를 떨며 자랑한다. 모두 ‘좋겠다~’ ‘부럽다~’ 응수해준다. 아침에 출근해 저녁 즈음에야 함께 만나는 부부인데도 왜 이리 서로에게 짐이 되어 버린 걸까. 혼자 사는 내가 ‘그래도~’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다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주말부부 되려던 아내 마음 돌린 진한 뽀뽀
그런데 앞서 걸어가던 남편이 잠시 돌아서더니 자기를 꼭 끌어안으며 귓속말을 하더란다. “날마다 새벽밥 하느라 고생 많았지. 혼자 있는 주중에 문화생활도 누리고 하고 싶은 일 많이 하고 자유롭게 지내. 밥 잘 챙겨 먹고….” 그러면서 뽀뽀를 진하게 해주더라는 것이다. 50대에 뭔 유치한 짓거리냐며 손사래를 치며 등 떠밀어 보내고는 아파트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데 눈물이 나더란다.
남편으로 산다는 건, 가장으로 산다는 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는 일인지….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해 준다며 투덜거려도 대꾸도 안 하던 사람의 깊은 마음속 아내 생각하는 마음이 뽀뽀 한 번에 다 들어있더라고. 그래서 같이 내려가 살면서 거기서 가끔 우렁각시가 되고, 하고 싶은 것도 틈틈이 하기로 했단다. 이 나이에 쓸모없을 것 같았던 그놈의 뽀뽀가 사람 잡았다고 웃으며 투덜거린다.
지나간 시간 속에 나 역시 생각나는 뽀뽀 사건이 있다. 간암을 선고받고 요양한다며 시골에 내려가서도 술을 못 끊는 아빠에게 아이들은 가끔 내려와 감리사처럼 조목조목 상태를 점검하며 잔소리를 했다.
“아빠,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술만 끊어주세요.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하세요. 저희가 다 하게 해 드릴게요. 술만 안 드시면 앞으로도 오래 살 수 있대요. 약속~” 다 큰 아이들이 손가락을 걸고 어리광까지 부렸다.
“오냐~ 이제부터 안 먹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 아이들은 그렇게 빈말로라도 아비의 약속을 받아내면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고 또 돌아가곤 했다. 당신이 아직 아이들에게 필요한 존재란 것에 힘입어 얼마 동안 술을 안 먹을 때는 얼굴색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러나 표정은 세상의 시름을 다 짊어진 듯 삶이 무의미하고 우울한 듯했다. 술은 차를 움직이게 하는 기름 격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고 시동을 거니 남편이 차를 세웠다. 내린 창문으로 큰 머리통이 사정없이 들어와 기습적인 뽀뽀를 했다. “흠마야~ 나이 들어서 유치하기는~ 영화 찍냐~” 민망해 투덜대며 머리를 밀어내려니 힘센 남편이 내 머리통을 부여잡고는 한참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은 내 편이지? 당신은 내 맘 알지?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지?”
그날 퇴근길에 남편에겐 오매불망 기다린 연인 같은 술을 한 박스 사 들고 들어왔다. 어린아이같이 좋아하던 그 날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 뭐가 있나. 하고 싶은 거 하다가 먹고 싶은 거 먹다가…. 그래, 그렇게 가자…!
인생의 중재자 역할 한 술
그러나 지금의 내 삶에 후회는 없다. 영혼으로 남은 그 사람이 그림자 같은 사랑으로 늘 지켜 준다는 걸 문득문득 느낀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스킨십은 참 많은 언어를 대신해 준다. 가끔은 막혀버린 삶의 통로에서도 살아서만 할 수 있는 마음을 담은 유치한 뽀뽀가 해답을 줄 수도 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