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때문에 회사 박차고 나왔더니 더 큰 지옥이

중앙일보

입력 2019.06.15 11:00

수정 2019.06.2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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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강명주의 비긴어게인(8)
어느 이직자의 하소연이다. 이전 직장에서 왜 그만두었는지 긴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새로운 조직 개편이 발표됐다. 가슴 두근거리며 인사본부에서 발표한 새로운 조직도를 사내 인트라넷 인사공문을 통해 읽어 내려간다. 이미 부서 통폐합이 예견됐기에 조직도 보다는 새로운 부서장이 누구인지에 눈길이 저절로 쏠린다. 드디어 관련 부서명이 보인다. 그 옆 칸에 부서장 이름이 나타난다.
 
어? 누구라고?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 본다. 후배 이름이다. 그것도 한참 어린 후배 이름. 도대체 이게 뭐지? 지난 20년 다른 동료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고과평가를 받아 왔다. 승진도 뒤지지 않았다. 그 후배는 남다른 성과를 달성하면서 승승장구해 왔다. 서로 부서가 달라 먼발치서 그저 잘 나가고 있구나 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행장 선임과 함께 좀 더 효율적이고 역동적인 본부 부서개편의 일환으로 여러 부서가 통폐합된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조직 개편 결과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이름 대신 신입사원 때부터 길러온 후배 이름이 적혀있다. 억울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일러스트 강경남]

 
기존 부서장인 상무는 퇴임하고 통합된 부서장 자리에 후배가 승진 발령됐다. 다른 후배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신입 교육을 한 새까만 후배가 아닌가. 사부님 하면서 잘 따라다녔던 후배였기에 더 감정이 복받쳤다. 차라리 다른 직장에서 스카우트 되어 온 젊은 부서장이라면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소 파격적인 승진 발령이어서 그 후배에 대한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행장과 같은 동향인 데다 모 지점에서 전에 같이 근무했다고 한다. 그때 행장을 도와 현격한 업무 성과를 내어 행장 신임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본인도 그 못지않은 성과를 냈다고 자부한다. 단지 신임 행장과 연관된 인연이 없을 뿐이다. 그 흔한 학연, 지연은 물론 함께 같이 일한 부서 인연도 없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인사의 공정성마저 의심이 들었다.


부서장으로 발령받은 첫날 부서 관리자 회의에서 자존심을 뭉개고 있었다. 그동안 해온 방식은 구태의연하다는 질책이 날아왔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는 것이다. 업무 분장도 다시 개편한다고 한다. 다른 부서에 있는 동기생이 부러웠다. 그 친구는 기존의 선배가 부서장 임원으로 연임되어 별 변동 없이 일을 계속하게 됐다. 일도 나보다 잘하는 친구도 아닌데, 억세게 운이 좋아 보였다.
 
주변 시선도 따갑게 느껴진다. 동료들이 등에 손을 올려 다독거린다. 나가라는 것도 아닌데. 좀 참고 새롭게 잘 해보라고 다독여준다. 동창들에게도 소문이 났는지 다들 위로해준다. 자존심이 더 상하고 만다.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른 금융기관에서 신용카드 업무 부서장을 뽑는다고 한다. 신용카드와 마케팅 분야에서 다년간 경험과 성과를 내온 터라 현재보다 더 좋은 조건이 제시됐다.
 
사라졌던 존재감이 확 살아났다. 이직하겠다고 하니 새로 부임한 후배가 깜짝 놀란다. 신입 시절 자기를 도와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며 이번 조직개편에 따른 새로운 조직에서 함께 손잡고 멋지게 만들어 가자고 한다. 붙잡는다. 그동안 상한 자존심을 단번에 되찾은 기분이다. 그 붙잡는 손을 뿌리치며 사표를 던지는 자신이 스스로 멋져 보였다. 후배에게 자존심 한 방 날리는 통쾌한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상처를 입고 속상해하던 중, 다른 회사에서 이직 제안이 왔다. 조건도 좋았다. 당장 사표를 쓰고 통쾌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하지만 이직 후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새로운 조직에서 새 출발을 하려니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어울리기 힘들었다. [일러스트 강경남]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의 저축은행 최고경영자(CEO) 시절이 떠오른다. 저축은행 경험도 없고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 저축은행장 임명은 임직원에게 충격이었다. 나이 많은 임직원들이 나에게 표출하는 반감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나보다 9살 많은 부사장과 함께 일하게 됐다. 300억원 넘는 적자를 내고 있었고 세 개의 각기 다른 저축은행 출신들이 모여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재무구조개선, 리스크관리, 영업력 강화, 신상품개발, 제반 검사와 감사, 인사관리 등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당시 부사장께서 힘든 여정에 의연하게 함께하며 힘이 됐고, 이후 다른 저축은행 CEO로 영전해 많은 후배의 귀감이 되었다.
 
“후배가 부서장으로 온 것이 자존심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 자존심 때문에 오히려 기회를 잃었습니다.” 폼나게 사직서 던지고 떠났을 때 그 모습은 어디 가고 긴 한숨만 내쉬고 있다. 새로운 기대와 부푼 희망을 가지고 새 직장에 들어갔지만 막상 새로운 조직에 가보니 새롭게 시작하는 어려움은 상상을 뛰어넘었다고 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경계와 보이지 않는 울타리는 너무 높아 그 벽을 넘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나이 불문하고 관련 부서장들에게 자존심은 이미 내다 버린 지 오래됐다고 한다. 새로운 조직에서 임원으로 승진한다는 것은 기존 장벽에 막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전 직장에 계속 있었다면 승진 기회가 더 주어졌을 거라고 아쉬워한다. 게다가 승진했던 후배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자리를 그만두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속상해하고 있었다.
 
동료나 후배가 먼저 승진했다고 자존심이 상했다면 그것은 실력 차다. 만약 그들에게 진정으로 축하해 주고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력차이가 아니라 곧 시간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강명주 WAA인재개발원 대표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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