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지음
창비
‘주정뱅이’ 권여선이 새 장편소설을 슬그머니 좌판에 내놨다. 오해 마시길. 작가가 주정뱅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평균 이상으로 음주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2016년 봄 출간돼 장안 술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빗대 실례될지 모르는 만용을 부려봤다.
긴 단편, 짧은 장편으로 개작
세월호 언급 안 한 애도 소설
시차가 있지만 두 번째 읽다 보니 작품의 장점과 특징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먼저 만족감(혹은 쾌감)을 잣대로 한 독서 효용. 당연히 합격점 이상이다. 작가가 권여선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문장을 마주칠 때 아, 내가 권여선을 읽고 있지, 했다.
“틀이 잡혀 굳어지기 전의 말랑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반죽 속에 뒤섞여 나만의 친교를 차근차근 맺어가고 싶었다.”(45쪽)
소재 및 줄거리. 살인사건이다. 소설의 절반 정도까지 살인범이 누구인지로 독자의 관심을 몰고 가 웬 추리물? 혹시 스릴러? 이런 의구심이 고개 드는 순간 약간 갑작스럽게 피해자의 여동생이 한정치산자 수준의 살인범 혐의자(물론 이 혐의자는 죄가 없다)를 찾아가 그의 고단한 삶, 처참한 처지에 공감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뀐다. 그러다 피해자의 여동생이 가해자로 짐작되는 이들에게 복수했음을 암시하는 장면들로 마무리. 그러니 결국 스릴러? 인간 심연 탐구라는 주제의식을 가미한?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피해자 해언의 여동생 다언(소설의 화자 중 한 명이다)과 자매의 어머니가, 언니이자 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는 대목들이다. ‘핍진(逼眞)’이라는 쉽지 않은 단어를 쓴다면 이럴 때일 것이다. 절절하게 감정을 쥐어짜는 장면 묘사는 권여선의 특기 중 하나다.
그런데 해언은 숨질 때 고3이었다. 시간 배경은 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2002년 여름. 연대기 순으로 구성된 소설은 시간적으로 2019년에까지 걸쳐 있다. 과거의 비극을 복기하며 슬픔을 재학습한다. 기자만 그런가? 어딘가 세월호를 떠오르게 하지 않나. 그렇다면 애도 소설, 세월호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세월호의 안타까운 죽음들을 슬퍼하는 소설이다. 가해자들에 대한 상상의 복수, 대리 복수를 감행한.
마무리. 시적으로 끝난다. 이런 문장은 비관이나 희망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시적이라는 얘기. 이렇게.
“그는 희열과 공포의 교차로를 가로질러 비상하듯 달려나간다. 환한 6월의 저녁 사양 속으로.”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