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 파괴자 박미희, 그가 해내면 역사가 된다

중앙일보

입력 2019.04.1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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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여자배구 통합우승 이끈 여성 감독

2018~19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결 정전 우승을 이끈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 [뉴스1]

박미희(56) 감독이 이끄는 흥국생명이 지난 3월 27일 막을 내린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했다. 정규리그 1위로 챔프전(5전3선승제)에 선착한 흥국생명은 도로공사에 3승1패를 거둬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흥국생명 역사상 12년 만의 통합우승, 10년 만의 챔프전 우승이었다.
 
박 감독은 스포츠계 ‘유리천장’을 깬 여성 지도자로 주목받고 있다. 선수 시절 ‘코트의 여우’로 불린 박미희는 2014년 흥국생명에 부임해 여성 지도자 최초로 2016~17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지난 시즌은 꼴찌로 떨어졌지만, 팀을 재정비해 여성 감독 최초 챔프전 우승, 통합우승의 역사를 썼다.

흥국생명 정규리그·챔프전 석권
여성에 기회 적고 차별 시선 여전

엄마의 마음으로 혼내고 다독여
이재영, 배려심 생기며 기량 성장

여성 감독 강점? 스킨십 자유로워
엉덩이·어깨 두드려줘도 괜찮죠

지난 2일,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흥국생명 연수원에서 박 감독을 만났다.


 
통합우승을 축하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인가요.
“전혀 아닙니다. 우리 승점이 몇 점이고 현재 몇 등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한 경기 한 경기 몰입했어요. 중간에 ‘우리 승점 몇 점이니’ 물어볼 정도였죠. 시즌 전 ‘부상 없이 버티면 정규리그 3등은 할 것 같고, 그러면 마지막에 뒤집을 기회는 오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요.
“외국인 선수의 컨디션이 떨어졌을 때 어떻게 격려하고 끌어올릴지, 국내 선수가 실망하지 않고 얼마만큼 버텨줄지가 관건이거든요. 다행히 저희는 위기에서 끝까지 한 번도 안 떨어지고 간 게 우승의 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 꼴찌 했을 땐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 생각도 했다면서요.
“건강도 너무 안 좋았고, 다시 해낼 수 있을까 회의도 들었어요. 아무리 휩쓸리지 않는다 해도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기도 힘들었고요. 그런데 2017년 정규리그 우승한 뒤 기사에 나온 ‘그녀가 가는 길이 곧 역사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죠.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한번 더 해보고 ‘역시 박미희다’ 소리 들으면서 물러나고 싶었어요.”
 

‘코트의 여우’라 불리던 현역 시절 박미희 선수. [중앙포토]

여성 지도자로서 유리천장을 실감하시나요.
“여자배구 여성 감독 1호가 조혜정 선배님(2010∼11년 GS칼텍스)이죠. 한 시즌 만에 경질됐어요. 조 선배가 실패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한 시즌 못했다고 쫓아내면 누가 새로운 걸 할 수 있을까요. 남자 감독이라도 그랬을까 싶어요. 그분이 그런 과정을 겪으며 길을 열었기 때문에 우리가 꿈을 꿀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현실적인 차별이 존재한다고 보시나요.
“일단 여성에게 기회가 적은 건 분명하죠. 또 같은 결과가 나와도 여성 지도자에게는 ‘카리스마가 없어서’ ‘선수를 장악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여성이 여자 선수를 지도하면 좋은 점도 있죠.
“아이들한테 어떤 터치를 해도 문제가 안 된다는 건 좋아요(웃음). 잘하면 엉덩이 두드려주고, 힘내라고 어깨를 만져줘도 괜찮거든요. 선수들의 신체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여자 선수 심리를 더 세심하게 느끼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건 감독님이 몰랐으면 좋겠다’하는 것까지도 간파할 수 있으니까요.”
 
‘감독은 영원한 짝사랑’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래요. 선수들에게 10을 주면 7∼8은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감독은 주기만 하고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난 똑같은 걸 주지만 받는 사람의 성격·성장배경 등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달라요.”
 
‘용병 대신 국내 스타’ 여자배구 인기 쑥쑥
 

V리그 챔프전에서 우승한 뒤 외국인 선수 톰시아와 포옹하는 박미희 감독. [뉴시스]

흥국생명은 ‘배구 여제’ 김연경(31·터키 엑자시바시)이 뛰던 2006∼09년 전성기를 누렸다. 김연경이 해외로 떠난 뒤 한동안 침체됐다 이재영(23·1m78cm)과 박 감독을 영입하며 정상에 재등극했다. 이재영은 뛰어난 탄력을 이용한 강스파이크뿐만 아니라 탄탄한 수비력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지난 시즌 팀 부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썼고, 국가대표 차출 거부 논란으로 악성댓글 폭격을 받았다. 올 시즌 정규리그·올스타전·챔프전 MVP를 휩쓴 이재영은 지난 1일 V리그 시상식에서도 “항상 말을 하면 욕을 먹지만, 어릴 때부터 해외 진출이 꿈이었어요”라며 여론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박 감독은 이재영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내기도 하고, 때로 엄마처럼 달래기도 하면서 심리적 안정과 자신감을 키워줬다.
 
이재영 선수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가장 좋아진 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고, 그게 되니까 기술도 함께 좋아진 것 같아요. 농구·축구는 혼자서 다 제치고 골 넣을 수 있지만 배구는 달라요. 공을 잡을 수도 없고, 땅에 떨어져서도 안 되고, 두 번 터치할 수도 없잖아요. 반드시 동료의 도움이 필요하죠. 재영이도 작년에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독불장군으로는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요.”
 
아직 트라우마를 못 떨친 것 같던데요.
“배구는 백전노장처럼 하지만 아직 재영이는 어리고 조그만 일에도 상처를 잘 받아요. 물론 많이 성숙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표현도 잘 합니다.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할 텐데 좀 아쉽긴 해요. 그러나 재영이 같은 스타일을 원하는 팀에 갈 수도 있겠죠. 기량을 더 발전시키고 오랫동안 뛸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여자배구 인기가 타 종목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한꺼번에 모아서 연습경기를 한 뒤 순번에 따라 지명)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 전에는 돈 많이 쓰는 팀이 좋은 용병 데려와서 혼자서 다 해버렸죠. 지금은 용병 수준이 비슷해지고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팀 간 전력 차가 줄고 국내 선수들 비중이 커졌어요. 물고 물리는 접전에, 국내 스타가 나오고, 경기 시간도 오후 5시에서 7시로 바뀌면서 시청과 직접 관람 환경이 좋아진 것도 인기 요인이죠.”
 
그럼에도 딸을 배구 시키려는 부모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죠. 아이들 숫자가 크게 줄었잖아요. 그래도 배구 인기가 올라가면서 이왕이면 배구를 시키겠다는 분들이 늘었어요. 키가 작으면 리베로, 크면 센터, 힘 좋으면 날개 공격수 하면 되니까 선택의 폭도 넓고요. 중요한 건 아이에게 운동 재능이 있느냐죠. 재능이 없으면 한계가 있어요. 좋은 선생님을 찾아주는 것도 부모 역할이죠.”


센터에 세터까지, 다재다능 ‘코트의 여우’

 
전남 해남 출신인 박미희는 광주여상-한양대를 거쳐 미도파에서 뛰었다. 1m74cm의 키로 센터·라이트·레프트에 심지어 세터까지 소화할 정도로 만능 선수였다. 그는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고관절 부상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수면제를 사 모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정도였다. 다행히 팀 내 크리스천 후배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기도 덕분에 기적 같은 회복을 했고, 88올림픽에 출전해 수비상을 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박미희는 깊은 신앙의 세계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매일 16명 선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한다고 했다. 박 감독은 “우리 딸·아들을 위해 이 정도로 기도했으면 벌써 크게 성공했을 걸요”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