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극한직업’에는 코미디 장르로서 진일보한 지점이 딱히 없다. 마약 단속반과 거대 범죄조직의 대결은 많이 본 구도다. 캐릭터 역시 코미디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뻔한 대결 구도 안에서 과장된 표정을 짓고, 과도한 말을 쏟으며, 익살스러운 몸짓을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연출가의 개성이 힘을 발휘했는지 모른다. 이병헌 감독은 별것 아닌 장면을 희극적으로 극대화하는 방법을 아는 연출가다. 무엇보다 말장난에 발군이다. 우리는 ‘스물’에서 사소한 다툼이 과장된 장면 구성, 엇갈리는 편집 리듬, 기발한 배경 음악을 통해 웃음의 시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사례를 알고 있다. ‘바람 바람 바람’에서 의뭉스러운 말맛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장면 극대화와 언어유희야말로 코미디 영화의 대표적 문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끝내기에 뭔가 미심쩍은 지점이 있다. ‘극한직업’의 웃음은 익숙함을 넘어 수상하다. 그것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작위적 우연을 가리는 도구로 작동한다. 이상하게도 영화는 위장 개업한 치킨 가게가 맛집으로 거듭나는 구체적인 실상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대체 그곳은 어떻게 그리도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가? 왕갈비 식당 아들인 형사 한 명이 타고난 재능으로, 말하자면 어쩌다 보니 우연히, 세상에 둘도 없는 맛있는 치킨을 만들어낸다는 게 영화가 제시한 해명의 전부다. 그러니까 영화는 해명해야 할 때 웃겨버린다. 가게의 입지, 치킨 조리법, 배달 네트워크 등과 관련된, 이 시대 진짜 자영업자가 처한 생존의 디테일은 웃음과 함께 가볍게 휘발된다. 그 성공은 판타지다.
이제야 말하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형사들이면서, 더 중요하게는 패배자들이다. 범인 체포는 미숙하고, 후배보다 승진이 늦으며, 상사에게 혼나고, 팀 해체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스크린 밖 우리가 영화에 접속할 수 있는 정서적 자리를 마련한다. 어쩌면 우리는 익숙한 웃음에 접속한 게 아니라 우리와 닮은 정의로운 패배자들의 성공에, 그 판타지에 접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극한직업’의 웃음이, 그 엄청난 흥행이 헛헛한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성공 판타지에 대한 호응은 현실에서의 성공 불가능성을 차갑게 반증하기 때문이다.
박우성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