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몸이 분리된 채 사망한 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끔찍한 사태는 그 자체 우리 사회의 심각하고도 불안한 징후이다. 이 사건에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겹쳐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제 대국의 허울 아래 감추어진 짐승 같은 노동 현장,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탈법 행위들, 사람보다 이윤을 더 중시하는 천박한 자본, 오로지 생계를 위해 죽음의 공포에 자신의 몸을 노출시켜야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 사태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18년 12월 13일자 ‘이데일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태안화력발전소는 정부로부터 ‘무재해 사업장’ 인증을 받았으며, 원청인 서부발전은 무재해 사업장이라며 정부로부터 5년간 산재보험료 22억여 원을 감면받았다. 직원들에게도 무재해 포상금이라며 4770만 원을 지급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징후들 속에서 다가올 비극을 읽고 미리 대비하는 국가가 아니라, 가짜 안전, 거짓 행복의 지우개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징후들을 마구 지우며 불행을 양산하는 국가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집 대문에서 굶어 죽은 개가 그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는 블레이크의 선언은 시인의 허사가 아니다. 세계의 모든 부분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개체의 불행은 대부분 관계의 산물이다. 주인이 잘 보살폈는데 그 집 대문에서 개가 굶어 죽을 일이 없다. 동물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주인의 태도가 무려 “나라의 멸망을 예고”하는 징후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관계가 존재에 선행한다. 영국 시인 존 던의 말대로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나’라는 존재의 ‘감소’를 의미한다. 타자의 죽음은 곧 나의 일부의 죽음인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