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나가느냐, 아니면 끌려 나가느냐. 정권 교체 이후 지난해말부터 과학기술분야 특수법인 대학 총장과 국책연구원 원장 등 기관장들은 둘 중 하나의 경로를 밟았다. 비리가 있으면 그에 걸맞는 처벌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감사·비위 통보·퇴진’이라는 사이클이 지난해말부터 과학기술계에서 공식처럼 굳어졌다. 중도 사임 직전까지 강도 높은 감사를 당한 사람도 여럿이다.
작년 말부터 과학술계 기관장
감사 → 비위 통보 → 퇴진 수순
묻지마 옷 벗기기 광풍 멈춰야
자진 사퇴한 기관장 11명 중 한 명인 A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저녁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스스로’란 표면 밑에 숨겨진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A원장 말에 따르면 과기정통부 고위직 한 사람이 먼저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나가달라고. 이유를 묻자 “다 아시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뭘 잘 못했길래 나가야 하느냐며 처음엔 버텼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고위직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나가달라고 했다. 누구의 요구냐고 묻자 “다 아시면서…. 묻지 마세요”라는 답변을 들었다. 여러 루트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이라는 게 문제라는 거였다. 그런데 얼마 후 기관에 대한 과기정통부의 감사 통보가 왔고, 감사팀이 들이닥쳤다.
“내 고집 때문에, 아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자리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기관 전체가 힘들어지게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버틸 힘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요. 나갈 테니 감사 그만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감사 책임자가 ‘기관에 대한 감사 결과를 공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그냥 무너졌어요.”
A원장의 말을 듣는 동안 내내 좌절감과 모멸감이 뒤섞인 얼굴을 지켜봤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의 인생과 명예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기술계 기관장이 무슨 정치성을 띠는 자리라고 이럴까. 오히려 해당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실적과 행정 경험이 필요한 자리가 아닌가. 평생 쌓아온 학문적 명성을 바탕으로 공익을 위해 희생하는 자리여야 맞지 않나.
그렇다면 비위를 캐는 목적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다. 먼지를 털고 적폐를 드러내 이를 개선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탈탈 털어 물러나게 하고 새사람을 세우자는 것인가. 과기정통부는 박근혜 정부 때 문화체육관광부가 가던 길을 걷지 말길 바란다. 감사로 찍어누르고, 자리에서 끌어내는 행위는 블랙리스트 만들어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행위보다 질이 더 안 좋다.
강홍준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