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귀해서 못 먹었던 쌀, 이젠 입맛 변해 덜 먹어
당시 서울의 한 호텔 일식 코너에서 근무한 이병환씨가 “처음에는 비웃던 일본사람들도 차츰 고개를 숙이더라”며 들려주는 잡곡 스시 제조 이야기. “보리는 식으면 찰기가 없는 데다 조금만 넣어도 검은색이 번져요. 그래서 보리는 조금 넣고 콩ㆍ팥ㆍ차조로 대신했지요. 그런데 차조가 골치예요. 이게 초하고는 안 어울리는 거라. 할 수 없이 미리 초를 손에다 묻혀 차조를 피해 비비느라 손이 벌겋게 헤어지고요. 하루 반 가마를 그렇게 만드니 배겨납니까” (중앙일보 1997년 9월11일자 5면 참고)
1965년 시험 재배에서 재래종보다 30% 이상 수확률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면서 당시 언론에서는 기적의 볍씨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희(熙)'자를 따 ‘희농1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해 재배한 결과 씨받이 마저 어려운 흉작에 그쳤다. 때마침 닥친 극심한 가뭄 탓도 있었지만 한국의 기후나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쌀의 자급자족을 도운 신품종은 1971년에야 나왔다. 서울대 농대 허문회 교수가 한국ㆍ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벼와 동남아지역에서 재배하는 다수확 종인 ‘인디카’ 벼를 다원 교배해 만든 'IR667'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통일벼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쌀이다. 통일벼는 타 품종보다 생산성이 30%가량 높았고, 정부의 적극적인 보급으로 한국은 1977년 쌀을 자급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허 교수의 업적을 기려 50원짜리 동전 뒷면에 통일벼를 새겨넣었다.
대신 허 교수의 육종 기술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활약으로 쌀 품종 개량이 이어지고, 비료와 농업기술의 발달로 80년대부터 질 좋고 맛있는 쌀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없어서 못 먹었던 쌀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덜 먹어서 남아도는 신세가 됐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국제화로 식생활이 서구화하면서 한국인의 쌀 소비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1970년 1인당 평균 136.4㎏에 달했던 쌀 소비량은 2017년 61.8㎏으로 반토막도 안 된다. 밥 한 공기가 200g인 점을 감안하면 국민 1인당 하루에 쌀밥을 한 공기 반 먹는 셈이다.
대신 육류 소비는 같은 기간 5.2㎏에서 49.1㎏으로 9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우유 소비는 약 50배, 계란 소비도 3배로 늘었다.
축산물 소비량 증가는 신장 등 체격 향상으로 이어졌다. 20세 기준 성인 키는 지난 55년간 8.5㎝가 커졌다. 남자의 경우 1960년 166.4㎝에서 2015년 174.9㎝로 커졌고, 같은 기간 여자는 153.8㎝에서 162.3㎝로 각각 8.5㎝ 커졌다. (농협 축산경제리서치센터)
이처럼 ‘먹는 즐거움’을 누리게 됐지만, 부작용도 있다. 동물성 식품과 지방의 과다 소비로 비만ㆍ고혈압 등 성인병 발병률이 높아져 식생활의 불균형을 이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국민의 식탁이 변하면서 쌀 생산량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 1965년 350만t이던 쌀 생산량은 1977년ㆍ88년 600만t을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을 마지막으로 500만t대를 기록한 뒤 계속 감소세를 보이더니 올해는 387만t으로 내려앉았다.
이개호 농식품부 장관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직불금을 재배작물, 생산 및 가격과 관계없이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꿀 생각”이라고 말했다.
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