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기증식에서 손창근(89)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국보급 유물을 저 대신 길이길이 잘 보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며 “앞으로 기증품에 ‘손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 달라.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손세기·손창근씨 부자 컬렉션
90세 아들이 중앙박물관 기증
부친 기탁품 중 ‘세한도’만 빠져
정선·장승업·허련 작품 등 망라
아버지는 개성 인삼으로 부 일궈
박진우 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은 “지난 7월 소장자께서 박물관으로 갑자기 찾아와 ‘이제 내가 90세가 된다. 11월 24일 생일을 맞아 그동안 기탁한 소장품을 기증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박진우 유물관리부장은 “이 컬렉션에는 값을 따질 수 없는 지정문화재급 명품이 많다. 앞으로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중에서도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첫손에 꼽는 것은 김정희의 ‘불이선란도’와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다. ‘불이선란도’는 그림보다 글씨 비중이 더 큰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동기와 방식, 그림의 주인이 바뀌게 된 사연을 적었다. 이수경 연구원은 “글씨와 그림의 배치 등에서 김정희의 뛰어난 공간 구성능력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불이선란도’는 추사가 지향하고 있는 이상적인 난초 그림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거칠게 흩어져서 메말라 있는 그림 속의 난초는 난초라기보다 갈대에 가까워 보인다. 그림을 잘 그리겠다는 욕심 없이 마음을 비우고 다다른 선적인 경지가 보이는 걸작 중 걸작”이라고 말했다.
‘잔서완석루’ 역시 명작으로 꼽힌다. 붓끝에 무게감을 실어 시적인 문구를 담았다. 이수경 연구원은 “잔과 완, 서와 석 글씨의 대비가 강렬하고 그 의미가 깊어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고 말했다.
고 손세기 선생은 일찍이 고향 개성에서부터 인삼 무역과 재배에 종사한 실업가였다. 그의 아들 손씨는 서울 공대 졸업 후 공군을 예편하고, 60년대 외국인 상사에서 근무한 이후 사업에 매진했다.
손세기 선생은 생전인 74년 서강대에 ‘양사언필 초서’(보물 제1624호)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이어 선친의 나눔 정신을 이은 손씨는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하고, 2012년에는 50여 년간 매년 자비로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경기도 용인의 1000억원대 산림 200만 평(서울 남산의 2배 면적)을 국가에 기부했다. 88세가 되던 2017년에도 50억원 상당의 건물과 함께 1억원을 KAIST에 기부했다.
배기동 중앙박물관장은 “이번 기증은 박물관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역사상 손에 꼽을 경사스러운 일”이라며 “우리나라 기증 및 기부 문화가 퍼져 문화강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기증자의 뜻이 널리 알려지기 바란다”고 했다. 박진우 유물관리부장은 “2011년 박물관에 기탁된 추사의 최고 명품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만 이번 기증 목록에서 빠졌다”고 덧붙였다.
중앙박물관 2층 서화관에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오픈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