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史)를 넘어 세계 경제사에도 이름 석 자를 남겼어야 할 이들의 존재는 우리 역사에서조차 흔적이 희미합니다.
납에서 은 추출하는 신기술, 연산군 폐위되자 묻혀
조선 기술 가져온 일본, 세계 2위 은 생산국으로.. 임진왜란 군사비 마련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 9년 5월 18일)
훗날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또는 회취법( 灰吹法))이라고 명명된 이 방법은 금속의 녹는점을 이용해 은을 추출하는 방식입니다. 일단 은광석(은이 포함된 광석)과 납을 섞어 태워 혼합물(함은연)을 만든 뒤 이것을 다시 가열해 녹는점이 낮은 납은 재에 스며들고 순수한 은만 남게 하는 것이지요.
역사상 은광석에서 순수 은을 추출하는 방법은 대단히 고급 기술에 속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은광석을 며칠이고 가열해 남은 재에서 순수 은을 걸러내는 고대 기술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노동력이나 시간과 비교하면 은의 생산량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금속의 녹는점을 활용한 연은분리법은 마법과도 같은 신기술이었죠.
사치를 권장하던 연산군
연산군은 조선에서 사치를 장려한 유일한 군주였습니다. 사관은 연산군의 죄상 중 하나로 “사치와 화려함이 극도에 달하였다”고 꼽기도 했죠. 연산군은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있던 고급 비단(紗羅綾緞)을 입을 수 있게 하는가 하면 비단 제조업도 장려했습니다. 또한 관리의 의복이 추악하다며 ‘재물을 아끼는 비루한 행위’라며 서울에서 누추한 의복을 입으면 종실 인사도 처벌한다는 전교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군주가 ‘돈’을 밝혀서였는지 관료들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지금의 경제부총리인 호조판서가 ‘채은납세제(採銀納稅制)’를 시행하자고 건의한 것이죠. 즉 민간에 은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걷자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연산군은 바로 시행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인당 하루 1냥(兩)을 은 현물 납세로 걷었다고 하는데,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제대로만 했으면 국가 수입이 크게 증대했겠지만, 실제로는 연산군이 총애하던 후궁(장숙용) 집안이 채굴권도 받고 면세 혜택도 받는 등 국정농단에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적폐가 된 연은분리법
신 정부의 첫 번째 목표는 연산군 시대의 적폐청산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은광의 민간 채굴은 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즉각 금지될 정도로 표적이 됐습니다. 이듬해 4월에는 연은분리법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해보라는 왕의 지시가 내려집니다. 그동안 은광 개발로 호황을 누렸던 관계자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들이었죠.
단천 은광은 중종 때도 “단천의 어디를 파도 모두 은광석이 나와 실로 무궁하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매장량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덕분에 은광으로 부를 축적하게 된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특히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명나라는 은에 대한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조선-명 사이의 사무역이 크게 증대하면서 상업도 크게 발달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중종 시대에도 몇몇 대신들은 재정 부양을 위해서 민간에 은 채굴을 다시 허용하자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민간에 은광 채굴을 일시 허용되기도 했지만, 곧 중단되는 등 은광 개발은 표류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넘어온 막대한 은
이후 『중종실록』을 보면 일본에서 들어온 은이 도성 시전에 가득 찰 정도라거나 일본 상인들이 은을 대거 가져와서는 무역을 요구한다는 보고가 연이어 올라옵니다. 조정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당황하죠.
그런데 50년 전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일본 사신들이 조선에 은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죠. 15세기 후반만 해도 일본은 후추 같은 특산품을 바치며 조선에 인삼, 호랑이 가죽 등과 함께 은을 요청하곤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막대한 일본 은의 출처는 어디였을까요.
연은분리법의 유출
"간원이 아뢰기를 '의주 판관(義州判官) 유서종 일가가 패란된 일이 많아 조관에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중종 32년 7월 16일)
명나라 국경을 맞댄 상업도시 의주는 은의 집결지이기도 했습니다. 관가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유서종은 은광 같은 이권 사업도 손을 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의주에 있던 그가 일본과 가까운 김해로 이동하자 연은분리법을 일본으로 넘기려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같은 시도는 유서종 뿐이 아니었습니다.
연은분리법 일본에서 꽃을 피우다
기록에 따르면 1526년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가 본격적으로 개발됐고, 조선에서 경수(慶寿)와 종단(宗丹)이라는 두 기술자를 초청해 연은분리법을 습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유서종 뿐 아니라 여러 기술자들이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넘어가 은 제련 기술을 전수했던 것이죠. 덕분에 일본의 은광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됐습니다.
전국 시대 이전인 무로마치 막부 시대만 해도 대외 진출에 소극적이던 일본이 임진왜란 때는 무려 30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은 생산량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이 개발하고도 외면한 연은분리법이 임진왜란을 가능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됐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김감불, 김검동 그리고 이삼평
연산군의 사치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중종반정 이후 처벌을 받지는 않았을까요. 중종반정 직후 은광 개발이 중단된 것이나, 이듬해에 연은분리법에 대한 금지를 논의했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두 사람이 편히 살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세계적인 화학자, 또는 연금술사로 이름을 남길 수도 있었던 두 인재는 자신들의 기술만큼이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이런 사례가 김감불과 김검동 뿐일까요.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도공 중 한 명입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일본의 흙으로 고급 도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해 아리타를 세계적인 도자기 명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리타의 도잔신사에는 이삼평을 기리며 만든 기념비를 볼 수 있지요.
강항이 남긴 『간양록(看羊錄)』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끌려온 기술자 대부분이 일본에서의 삶과 대우가 훨씬 좋았기 때문에 조선 귀환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조선 조정은 이들을 괘씸하다고 생각했을 뿐, 기술이나 기술자를 우대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까지 나아가지 못했지요.
김감불-김검동과 연은분리법의 운명이 떠오른 것은 얼마 전 한 기사를 읽고 나서였습니다.
지난해부터 한국전력기술 핵심 직원 12명이 우리나라가 원전을 수출한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공사(ENEC)와 UAE 원전 운영 법인인나와(Nawah) 에너지로 이직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한전기술의 원전 설계 담당 직원은 2017년 1062명에서 2030년에는 743명으로 30% 가까이 줄어든다는 자체 분석 결과도 나왔습니다. 전문 인력들이 중국 기업으로 옮기면서 기술이 유출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탈원전이 대세라고 하지만 정작 세계 주요국들은 원전을 추가로 건설하는 추세입니다. 최근 영국은 원전을 추가 건설하기로 했고, 2011년 동일본 쓰나미 이후 원전 사용을 자제했던 일본도 원전 건설을 재개했습니다. 전기를 생산하는데 비교적 저렴한 비용과 탈화석 연료로써 환경 오염이 적다는 메리트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박평식 『16世紀 對中貿易의 盛況과 國內商業』·『16世紀 對日貿易의 展開와 葛藤』, 구도영 『16세기 조선 對明使行貿易의 교역규모 검토』·『16세기 조선의 對明貿易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국면』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