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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영국 ‘리처드 3세’는 정말 꼽추였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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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㉖ 리처드 3세는 정말 꼽추였을까

“Since I cannot prove a lover, To entertain these fair well-spoken days, I am determined to prove a villain…Plots have I laid, inductions dangerous”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길 수 없기에 나는 악인(villain·빌런)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음모는 꾸며놓았다, 위험한 서막이지.”)
-'리처드 3세(Richard Ⅲ)’ 1막 1장 中-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리처드 3세' [중앙포토]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리처드 3세' [중앙포토]

올해 공연계에는 유난히 ‘리처드 3세’ 공연이 많았습니다.

3월엔 인기 배우 황정민씨가 출연한 ‘리처드 3세’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6월엔 세계적 명성을 얻는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와 실험적 시도로 유명한 장 랑베르-빌드의 ‘리처드 3세’가 LG아트센터와 명동예술극장에서 각각 상연됐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국내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매우 낮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었죠.

※리처드 3세를 비롯해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은 모두 잉글랜드 역사에 속하지만 문맥 편의상 영국으로 통일합니다.

리처드 3세는 누구

올해 3월 예술의전당에 오른 연극 '리처드 3세'의 포스터

올해 3월 예술의전당에 오른 연극 '리처드 3세'의 포스터

리처드 3세는 1막 1장의 대사만큼이나 영국사에서 오랫동안 전형적 악인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장미 전쟁' 당시 요크 가문(흰 장미) 출신이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 형이 죽자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을 맡다가,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야심만만한 인물이죠.
꼽추에 추남인 그는 각종 간사한 모략을 벌여 형제들을 이간시키고 친형과 조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가 하면, 왕위 찬탈을 도운 공신들이 서로 의심하고 죽이게끔 만드는 비열한 인간이었습니다. 결국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튜더 가문의 리치먼드(헨리 7세)가 일으킨 반란군과의 싸움(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하며 오욕의 일생을 마쳤죠.

잉글랜드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7세. 헨리8세의 부친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이다. [중앙포토]

잉글랜드 튜더 왕조를 개창한 헨리7세. 헨리8세의 부친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조부이다. [중앙포토]

영국 역사를 돌아보면 대중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왕들이 몇몇 있습니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내 영국 영토를 완전히 잃은-우리에겐 영화와 소설 ‘로빈 후드’에서 악정을 펼쳐 존재감을 알린-존이 있고, 영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두대에 끌려 나와 목이 잘린 찰스 1세, 엘리자베스 여왕의 언니이면서 각종 피바람을 불러일으켜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여왕 등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그 누구도 리처드 3세가 얻은 만큼의 오명은 누리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리처드 3세를 악당 중의 악당으로 그려낸 셰익스피어의 ‘공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중앙포토]

윌리엄 셰익스피어 [중앙포토]

역사는 승자의 기록

튜더(Tudor) 왕조는 헨리 8세, 메리 여왕(블러디 메리),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등을 배출한 유명한 왕가입니다. 리처드 3세를 물리친 헨리 7세가 개창했죠.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누구입니까.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 전폭적인 후원을 했던 극작가였습니다. 그런 셰익스피어의 손에서 그려지는 튜더 왕조의 개창은 하늘의 뜻이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할아버지이자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는 정의의 실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상상화, 1839), 버튼스 젠틀맨스 매거진 [중앙포토]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상상화, 1839), 버튼스 젠틀맨스 매거진 [중앙포토]

조선 세종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서사시를 만들도록 해 조부 이성계의 역성혁명 과정을 천명에 따른 것으로 그린 것과 마찬가지죠.

"군주의 권력을 다루는 연극은 항상 정치적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Richard III)는 요크 왕가를 물리치고 헨리 7세로 등극하는 리치먼드의 승리를 통해 소위 ‘튜더 신화’를 재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치적 사극이다." (김종환,『「리처드 3세」와 권력의 연극성』)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처럼 리처드 3세의 악명도 역사의 승자였던 헨리 7세 측 입장이 반영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배트맨이 빛나려면 조커가 필요하듯이 리처드 3세는 튜더 왕조를 위해 기꺼이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리처드 3세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 선택권은 더더욱 없었죠.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리처드 3세' [중앙포토]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리처드 3세' [중앙포토]

리처드 3세는 정말 악당에 불과했나 

운명이 걸린 보스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Field) 당시 리처드 3세가 소집한 핵심 귀족 5명 중 4명이 불참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 훌륭한 왕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조카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과정부터도 석연치 않았죠.
하지만 남겨진 기록을 따라가 보면 리처드 3세가 셰익스피어의 묘사만큼이나 악당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무성영화 '리처드3세'에서 프레데릭 워드가 사악한 리처드를 연기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무성영화 '리처드3세'에서 프레데릭 워드가 사악한 리처드를 연기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일단 그의 짧은 치세 기간 중 발표된 공법 15조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왕국의 백성들은 덕세(인두세)를 내지 않는다(1조)”, “모든 치안 판사는 죄수에게 조건부 석방 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 죄수가 사권(私權·private rights)을 박탈당할 때까지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없다(3조)” 등입니다. 그는 선대에서 내려진 무거운 조세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고 사법권이 보다 공평하게 처리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매매행위에 대해선 외국인 규제를 가한다(9조)”나 “이탈리아 상인들은 포도주 1통당 10개의 좋은 활을 만들 목재를 납부한다”(11조) 등은 당시 최대 경제강국인 이탈리아 상권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군사력을 보강하려는 조치로 평가받습니다.

꼽추라는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자신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 가문의 반란으로 왕위를 잃을 위기에 처했던 바닛 전투와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는 앞장서 맹활약을 펼치며 왕위를 지켜내기도 했죠.
이 때문에 학계에선 리처드 3세가 비록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했지만, 행정과 전투 등에서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갖췄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연극 '리처드 3세'에서 절규하는 리처드 3세(황정민) [중앙포토]

연극 '리처드 3세'에서 절규하는 리처드 3세(황정민) [중앙포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보스워스 전투의 패배가 명확해진 리처드 3세는 “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 horse.(말을 다오, 말을! 말을 준다면 내 왕국을 넘기겠다)”라고 내뱉습니다. 매우 유명한 이 대사에 대한 해석은 중의적입니다.
문학적으로 볼 때는 '말 한 필'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고립무원에 빠진 리처드 3세의 비극적 상황을 강조하는 쪽입니다. 하지만 역사학적으로 볼 땐 그가 마지막까지 힘을 짜내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려는 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보스워스 전투에 대한 실제 기록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정예 기사 100명을 모아 최전방으로 스스로 돌격해 들어갔다가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겁쟁이가 아니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600년만의 반전

영국 레스터 시내의 한 주차장에서 발굴된 리처드 3세의 유해와 복원된 얼굴 [중앙포토]

영국 레스터 시내의 한 주차장에서 발굴된 리처드 3세의 유해와 복원된 얼굴 [중앙포토]

영원한 ‘악인’ 리처드 3세가 영국을 다시 뜨겁게 달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2012년 9월, 영국 중부지역 레스터의 시의회 주차장 지하에서 오래된 유골이 발견됐는데 감식 결과 리처드 3세로 확인된 것입니다. 감식팀에선 그가 심각한 척추측만증을 앓은 것은 맞지만,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만큼의 꼽추는 아니었으며, 일상 생활에서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애초에 주요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그가 심각한 육체적 장애를 가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죠.

2015년 5월 리처드 3세의 유해를 싣고 레스터 성당으로 향하는 마차 [중앙포토]

2015년 5월 리처드 3세의 유해를 싣고 레스터 성당으로 향하는 마차 [중앙포토]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한 뒤 어딘가 방치됐다가 없어진 줄 알았던 리처드 3세의 유해가 600년 만에 나타나자, 영국 사회는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학계에서는 리처드 3세를 재평가했고, 영국 왕실의 주도하에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기도 했죠. 40억 원가량이 든 장례비용은 레스터 시가 부담했으며, 추모사는 리처드 3세의 먼 후손이자 BBC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았습니다.

리처드 3세의 후손으로 알려진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중앙포토]

리처드 3세의 후손으로 알려진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중앙포토]

죽은 직후였으면 절대로 얻지 못했을 관심과 인기를 받고 영면한 리처드 3세가 은총을 내린 것일까요. 이어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2부리그를 전전하다가 승격한 축구팀 레스터 시티가 2015~2016년 시즌에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EPL) 타이틀을 거머쥐는 대이변이 벌어진 거죠.
시즌 전 레스터 시티의 우승 가능성은 1/5000에 불과했습니다. 2000년 이후 EPL에서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맨체스터 시티가 아닌 다른 팀이 우승한 건 이때가 유일합니다. 한국 같았으면 계룡산에 리처드 3세를 모신 신당 하나 차리지는 않았을까요.

레스터 시티가 2015~2016 시즌 우승을 확정짓고 환호하고 있다 [중앙포토]

레스터 시티가 2015~2016 시즌 우승을 확정짓고 환호하고 있다 [중앙포토]

리처드 3세와 수양대군의 차이

조선에도 리처드 3세와 거의 흡사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세조가 된 수양대군입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조카 단종의 섭정 노릇을 하다가 아예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며 왕위에 올랐죠. 집권 과정도 그렇고 행정과 군사 등 실무능력을 인정받은 것도 비슷합니다.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 [중앙포토]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 [중앙포토]

하지만 세조는 리처드 3세처럼 모욕적으로 역사의 조리돌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양 측의 차이는 반란에 대한 대응과 왕위 계승의 성공 여부죠. 세조는 집권 후 이징옥의 난 등 반란군을 궤멸시켰고, 그의 아들(비록 왕위에 오른 지 18개월 만에 단명했지만)에게 왕위를 계승시켰습니다.
이런 전례 때문인지 정치에서는 ‘일단은 이기고 봐야 한다’는 전제가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긴 자에겐 영광이 패배한 자에겐 오욕만 남을 뿐이니까요.

2009년 5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마치고 대검찰청을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2009년 5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마치고 대검찰청을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악당'이 지배하는 나라

이런 전제가 가장 확실히 들어맞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만 해도 24일 2심에서 징역 25년, 벌금 2백억 원이라는 중형을 선고 받았죠. 역사를 돌이켜보면 박 전 대통령 뿐 아니라 단 한 명의 대통령도 무사히 임기 후를 보내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 직선제가 부활한 87년 체제 이후의 대통령(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은 모두 본인 혹은 최측근이 수사를 받아 사법처리 되거나 심지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30년간 분명 경제 수준도 나아졌고 문화 수준도 높아진 것 같은데, 국민은 ‘악당’만 선택해 온 셈일까요.

'뇌물수수·횡령·조세포탈'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77)이 7월 14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는 다섯 번째 전직 대통령이다. [뉴스1]

'뇌물수수·횡령·조세포탈'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77)이 7월 14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는 다섯 번째 전직 대통령이다. [뉴스1]

그나마 정권 계승으로 임기 후를 비교적 편안하게 보내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정권이 교체되자 감옥으로 갔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뿐만 아니라 전전 정권도 무사할 수 없다는 ‘교훈’이 남겨졌으니 앞으로 정치권에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대선에 승리하려 하겠죠.
‘빌런’이 지배했던 나라, 대한민국.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꼬리표가 붙는 상황은 언제까지 반복될까요.

◇첨언: 예전에 공연계를 출입할 때 한 연출가는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 연극 '햄릿'이 많이 상연된다”며 “저항과 순응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들도 버리고, 공신들은 충성 경쟁에 눈이 멀어 서로 견제하며 부정 행위에 가담하다가 모두 파멸하는 과정이 주요 줄거리죠. 또, 처음엔 리처드 3세를 도왔으나 그의 폭정에 실망해 반란의 대열에 서는 버킹엄 공작 같은 인물도 등장합니다.
탄핵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올라간 2018년 3월은 박근혜 정부가 임기를 마친(2018년 2월) 직후가 되었겠군요. 진실은 연출가만 알겠지요.

※이 기사는 김종환 『「리처드 3세」와 권력의 연극성』, 고근영 『‘미완’의 괴물 「리처드 3세」의 문화적 텍스트로서의 저항성』, 홍기영 『리처드 3세와 연산군의 비교: 폭정의 원인과 과정』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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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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