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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21세기 '아편전쟁'의 승자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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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㉕ 21세기 '아편전쟁'의 승자는? 

미국과 중국이 지난 7월 시작한 무역전쟁은 여러모로 150년 전 벌어진 아편전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첫째, 갈등의 원인이 된 무역수지 불균형입니다.
영국은 중국(청) 시장을 두고 ‘황금알을 낳는 오리’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막상 중국 시장을 열었더니 무역 적자만 쌓여갔습니다. 중국산 제품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일단 값싼 중국 노동력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적어도 인도에서 들여온 면직물만큼은 중국 시장 공략이 가능할 거라고 봤지만 수 억명의 중국인이 생산한 면직물과 가격 경쟁을 하기엔 버거웠습니다. 인도보다 인건비가 비싼 영국 본토의 제품은 말할 나위도 없었죠.

제1차 아편전쟁(1839~42)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7일,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의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 15척을 궤멸시키고 있다. [사진제공=글항아리]

제1차 아편전쟁(1839~42)이 한창이던 1841년 1월 7일, 동인도회사가 만든 철제 증기선 네메시스호(그림의 오른쪽)가 청나라 범선 15척을 궤멸시키고 있다. [사진제공=글항아리]

반면 청나라는 차(茶) 수출로 큰 재미를 봤습니다. 마치 현재 중국의 저가(低價) 제조품 같다고나 할까요. 당시 중국의 차가 영국을 비롯해 서구 사회 곳곳에 침투했고 어느덧 중국 차가 없는 것은 상상도 없는 수준이 됐죠.
그 결과 마치 지금의 미국 달러처럼 당시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하던 은(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4200만냥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무역수지 불균형은 영국 정부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청나라 시기 아편굴을 묘사한 그림 [중앙포토]

청나라 시기 아편굴을 묘사한 그림 [중앙포토]

둘째. 시장개방에 대한 입장 차이입니다.
청나라는 광저우(廣州)만 문을 열고 매우 제한된 무역 체제를 고수했습니다. 역사에선 '광둥 무역체제(Canton trade system)'이라고 부릅니다.
하필 개항된 곳이 광저우 같은 중국 남부라는 점도 영국엔 불리했습니다. 이 지역은 겨울에도 기온이 좀처럼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곳이죠. 영국이 자랑하는 모직물도 이곳에선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피아노 같은 제품은 아예 관심조차 끌기 어려운 고급 사치품에 불과했죠.
영국은 광저우 외에 다른 무역항을 열어 시장이 확대된다면 무역수지 불균형이 개선될 것이라고 판단해 이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청나라 조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편이 직접적 발화점이 된 것은 맞지만, 전쟁의 원인 전부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청나라 조정에서 아편 매매를 금지했을 때, 영국 상인들은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으니까요.

당시 영국의 파머스톤 외무장관도 중국 주재 사절단에게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영국 정부는 청나라 정부가 아편의 수입을 금지할 권리가 있으며, 외국인 혹은 중국 백성들이 중국 영토 내로 밀반입한 아편을 몰수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여왕 폐하께서는 그 사안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제시하지 않았다."  
즉, 아편전쟁은 중국의 시장 개방에 대한 양국의 입장 차이가 근원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편을 몰수해 태워 아편전쟁을 촉발한 임칙서. [중앙포토]

아편을 몰수해 태워 아편전쟁을 촉발한 임칙서. [중앙포토]

셋째, 동맹의 유무입니다.
중국 역사가 페이정칭은 『중국: 전통과 변천』이라는 책에서 “사실 영국은 외교적 평등과 통상 요구라는 측면에서 당시 모든 서방 국가들의 희망을 대변하는 입장이었다”“영국이 나서지 않았다면 다른 국가들도 똑같은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아편은 단지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중국 시장 개방에 대한 서구 열강의 이해는 일치했습니다. 이때문에 제2차 아편전쟁에선 다른 열강들도 가세합니다. 청 vs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구도로 진행된 것이죠.

반면 청나라는 동맹이라고 부를 만한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자신은 천자국으로 주변은 오랑캐 조공국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동맹이라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죠.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영화 '아편전쟁'의 한 장면

넷째, 상대에 대한 오판입니다.
아편전쟁이 처음 시작됐을 당시 청나라 조정은 영국의 목적이 몰수당한 아편을 돌려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시적인 분쟁이 벌어진 것이라고 판단한 청 황제 도광제는 “영국 오랑캐가 은혜를 애걸하고 있다니 통상을 허용하고 손해 본 액수를 갚아줘라”고 말했을 정도로 상황을 낙관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2년간 이어졌고 청나라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뒤 받아 든 영수증(난징 조약)엔 홍콩의 할양, 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 개항, 관세 폐지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개항과 관세 폐지는 이후 1세기 가까이 중국 경제를 파탄에 빠지게 만드는 족쇄가 됐습니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미ㆍ중의 무역전쟁을 오로지 경제적 측면에서만 볼 수만은 없습니다. 또 당시의 청나라와 지금의 중국은 상황이 다르기도 합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놓인 미국과 중국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세력이 지배세력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위협할 때 발생하는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혼란 상황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레이엄 앨리슨의 『예정된 전쟁』에서 저자는 16세기 전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와 영국, 19세기 말 중국과 일본, 세계 제1ㆍ2차대전 당시의 영국ㆍ프랑스와 독일 등을 이런 관계로 봤습니다.

1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계기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 장면을 묘사한 아킬레벨트람의 그림. 이탈리아 주간지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 1914년 7월 12일자 1면. [중앙포토]

1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계기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 장면을 묘사한 아킬레벨트람의 그림. 이탈리아 주간지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 1914년 7월 12일자 1면. [중앙포토]

마찬가지로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전쟁의 이면에는 경제를 넘어 21세기 세계 패권을 두고 싸우는 강대국과 신흥국의 갈등, 즉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심기를 거스른 결정적인 계기로 '중국제조 2025'를 꼽기도 합니다. '중국제조 2025'는 향후 30년간 3단계에 걸쳐 산업고도화를 추진한다는 전략으로 그 대상엔 차세대 IT 기술, 항공우주장비, 바이오의약 및 고성능 의료기기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모두 미국의 핵심 산업이죠.

미국 경제와 비교한 중국 경제 규모 [자료=세계은행, 그레이엄 앨리슨 『예정된 전쟁』에서 재인용]

미국 경제와 비교한 중국 경제 규모 [자료=세계은행, 그레이엄 앨리슨 『예정된 전쟁』에서 재인용]

이를 바라본 미국 지도부로서는 '더는 중국을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위협을 충분히 느꼈을 것입니다.
특히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인사인 피터 나바로 미국 국가무역위원회 위원장은 『중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Death by China)』이라는 책을 집필했을 정도로 대중국 매파로 유명한데 중국에 대한 압박과 경제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인물입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아테네-미국 vs  스파르타-중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과거 냉전 시절 미·소 대립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엔 중국과 미국이 각각 스파르타ㆍ아테네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아테네의 특징을 볼까요.
아테네는 해양국으로 해군이 정예 전력이었습니다. 고대 민주주의의 꽃이 핀 국가이고 주변 국가와 적극적인 무역으로 부를 쌓았습니다.
특히 아테네의 힘은 200여개 도시국가가 결속된 델로스 동맹이었습니다. 제1ㆍ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함께 싸웠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공동방위체제로 만든 델로스 동맹은 단순한 동맹 성격을 넘어 자유무역 체제와 민주주의라는 경제 및 정치체제로까지 확장됐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만들어진 미국과 나토(NATO)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있죠.

델포이 성역이 시작되는 입구에 위치한 마르마리아 라고 불리는 아테네 여신의 신전.고대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중앙포토]

델포이 성역이 시작되는 입구에 위치한 마르마리아 라고 불리는 아테네 여신의 신전.고대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중앙포토]

반면 스파르타는 내륙국으로 육군이 정예병입니다. 정치체제는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과두체제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먼저 헌법(리쿠르고스의 헌법)을 만든 자부심도 강해서 누구도 자신들의 시스템을 모방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또, 순혈주의도 강했습니다.
이런 스파르타가 늘 염려하던 것은 아테네의 정치 시스템이 자국 안으로 퍼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른 나라들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활발한 교류를 하기보다는 일국 체제를 지향했고, 다른 나라의 상황에 얽히게 되는 것을 대단히 꺼렸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이긴 했지만, 이 동맹은 서로의 체제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고 구속력이 거의 없어 전쟁 시기를 제외하면 대단히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에 가까웠습니다.

제1차 페르시아전쟁을 다룬 영화 '300'의 한 장면 [중앙포토]

제1차 페르시아전쟁을 다룬 영화 '300'의 한 장면 [중앙포토]

그리스가 둘로 쪼개져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개 과정을 보면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울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 전쟁의 발단은 사실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무관했습니다. 코르푸라는 작은 도시와 코린토스의 분쟁이 벌어졌을 때, 아테네가 코르푸를 돕기로 하자 이에 반발한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에 개입을 요청하면서 시작됐죠.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을 둘러싼 미·중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 같지 않나요?

'동맹'이 승부를 갈랐다  

30여년의 혈투 끝에 전쟁의 승자가 된 건 스파르타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승리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코린토스와 테베라는 그리스 주요 세력을 동맹으로 묶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흔히 고대 그리스의 중심 도시라면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떠올리지만 실제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해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 다섯 도시가 강호였습니다. 그리스의 '춘추 5패'랄까요. 아테네는 이중 가장 늦게 일어선 신흥국에 속했습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중앙포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중앙포토]

코린토스와 테베는 스파르타 측에 함께 했습니다. 아르고스는 중립을 지켰습니다. 주요 5개 도시 중 아군을 확보하지 못하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아테네는 장기전에서 버티기가 어려웠습니다.
얼마 전 미국이 관세 공격을 시작하자 중국은 “미국의 무역위협에 공동대응하자”며 세계에 호소했지만 응답 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죠. 이는 무역전쟁에 맞선 중국 지도부의 가장 큰 오판 중 하나로 꼽힙니다.

두보가 겪었던 전쟁, 안사지란(安史之亂)의 주요 현장이었던 시안의 명나라 때 성곽 모습.  [중앙포토]

두보가 겪었던 전쟁, 안사지란(安史之亂)의 주요 현장이었던 시안의 명나라 때 성곽 모습. [중앙포토]

최근 중국의 경제 전문가 쉬이미아오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를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중국은 무역전쟁에 대응해 유럽 등과 힘을 합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유럽연합(EU), 일본, 멕시코 등이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분위기다.” 
당초 중국은 미국의 관세폭탄에 맞서 EU 등 다른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 봤지만, 결과는 반대였죠. 오히려 EUㆍ일본 등 세계 경제의 주요 세력들은 미국과 맞서기보다는 한 편이 되는 쪽을 택했습니다.

트럼프의 미국도 아테네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테네의 힘은 자국 해군력뿐 아니라 200개에 달하는 동맹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자국 상황이 악화하자 차츰 동맹국에 무리한 요구를 내놓기 시작합니다. 이같은 행위는 동맹국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결정타가 됐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중앙포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과실은 썼습니다. 승리한 스파르타도 얼마 버티지 못했습니다. 고립체제를 선호했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발달시킨 무역체제를 이어받아 그리스 세계의 번영을 이끌어 가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세계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한 달 여간 이어진 무역전쟁의 끝은 어디일까요. 세계 각국에서 비명이 나오고, 중국 뿐 아니라 미국도 내부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누가 이기든 결국 칼끝은 전쟁 당사자를 겨누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역사의 교훈이 그렇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이학로 『아편전쟁시기(1839~1842) 중국의 아편문제』,  신윤길 『영국 동인도회사와 파머스턴의 포함정책(gunboat policy)』, 리중텐 『제국의 슬픔』, 그레이엄 앨리슨 『예정된 전쟁』을 인용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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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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