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계 피카소’ 무대 위에 음악을 그리다

중앙일보

입력 2018.11.10 02:00

수정 2018.11.10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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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연출하는 아힘 프라이어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리허설 도중 직접 디자인한 의상의 디테일을 살피고 있는 아힘 프라이어

올해 70주년을 맞은 한국 오페라가 바그너의 대표작 ‘니벨룽의 반지’ 제작에 처음으로 도전한다. ‘니벨룽의 반지’는 4부작이 나흘간 총 16시간에 걸쳐 공연되는 대작이기에 이제껏 국내 공연은 2005년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러시아 마린스키 오페라단의 내한 공연이 전부였다. 이번에 재독 소프라노 에스더 리가 창단한 월드아트오페라가 일을 벌였다. 뉴욕타임스가 “현역 오페라 연출가 중 가장 뛰어나다”고 극찬한 독일의 거장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84)의 연출로 12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2020년까지 3년 간의 대장정에 나선 것. 바그너의 성지로 불리는 바이로이트에서나 보는 줄 알았던 ‘니벨룽의 반지’가 한국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탄생할까. 1편 ‘라인의 황금’(11월 14~1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이 한창인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를 찾았다. 
 
2일 오후. 옛 취수장 건물을 개조한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거대한 연습장에는 ‘니벨룽의 반지’ 런쓰루가 한창이었다. 커다란 철골 구조물에 로켓트·탱크가 달린 무대세트, 도르래에 걸린 링에선 서커스 묘기까지, 오케스트라만 없을 뿐 실제 공연과 다를 바 없는 규모였다. 검정색 생활한복을 입은 아힘 프라이어 연출은 가설 무대를 오르내리며 디테일을 살피고 있었다.  
 
10월 한 달간 슈만의 오페라 ‘괴테 파우스트의 풍경’ 제작을 위해 독일 함부르크 극장에 머물렀던 프라이어 연출은 지난달 31일 바이로이트 가수 8명을 이끌고 귀국하자마자 리허설에 돌입했다. 노구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당연히 힘들다”고 했다. “다행히 지난 여름 한 달간 리허설을 했기에 이번엔 집에 돌아오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한국 가수와 독일 가수들이 한가족처럼 잘 어울리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답니다.”  
 
프라이어는 세계적인 거장이지만 한국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2011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창극 ‘수궁가’를 연출했다. 이번 무대에서 프레야 역을 맡은 에스더 리 단장이 그의 부인이기도 하다.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생활한복의 매니어가 되어 독일에서도 한복을 입고 커튼콜 무대에 오르곤 한다. 이번 공연도 특별히 한국인들을 위해 재해석해 제작한 버전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주제들은 세계 공통의 토론거리이기도 합니다. 전쟁·환경·자연 및 우주 파괴 등이 ‘니벨룽의 반지’에 깔려 있는 테마죠. 바그너의 예술은 관객을 능동적인 주체로서 공연에 참여시킨다는 의미가 있어요. 시적인 영감을 극장으로 가져와 구현하면서 정치적 이슈까지 포함시켰죠. ‘라인의 황금’에서 사랑을 부정하는 자만이 황금을 차지한다는 설정은 모든 사회질서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세계의 불행에 직면한 빈부 문제, 난민 문제 등이 다 포함돼 있죠.”  

독특한 분장과 의상 디자인에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 첫 날부터 드레스리허설로 시작했다.

 
고대 북유럽 전설과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에 기초한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제1부 (전야)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제2부 (제1야) ‘발퀴레(Die Walk<00FC>re)’, 제3부 (제2야) ‘지크프리트(Siegfried)’, 제4부 (제3야) ‘신들의 황혼(G<00F6>tterd<00E4>mmerung)’ 전 4악장을 바그너 혼자 대본을 쓰고 작곡했다. 탐욕으로 저주받은 반지가 저주에서 풀려나기까지의 여정과 그 반지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다. ‘악극을 통한 사회 개혁’이라는 바그너의 이상 아래 권력의 허망함, 인생의 덧없음 등 인간 삶의 보편적인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심각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관객 연령은 0~100세”라고 했다. 신들의 세계와 난쟁이 니벨룽족의 세계, 인간의 세계를 종횡무진 오가는 방대한 세계관을 ‘오페라계의 피카소’답게 이솝우화처럼 어린이도 즐길 수 있도록 풀어낼 예정이다. “물론 ‘반지’가 아이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죠. 어른의 동심을 깨우는 것도 극장의 의무입니다. 이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품에 녹아있는데,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걸 배우게 될 거예요. 바그너 팬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번 공연을 통해 그 시간이 단축됐으면 해요. 바그너를 잘 연출하면 3시간이 번개처럼 흐를 겁니다.”  
 
동·서독 경험 집대성해 남북한 포용하는 무대 꿈꿔

북유럽신화의 다양한 신과 난쟁이족, 거인족, 요정들을 아힘 프라이어식으로 형상화한 등장 캐릭터들

‘니벨룽의 반지’는 올 초 제작 발표회에서 “한국 공연에 맞춤해 남북 분단 상황과 핵전쟁 위협 등을 담아낼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몇 달 새 화해무드가 급진전되면서 북한 성악가 캐스팅을 추진하기도 했다. 제작 여건상 이번 공연엔 성사되지 않았지만, 내년 2부에도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그가 통일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베를린 미대를 졸업한 화가이기도 한 프라이어는 1972년 부자유와 압제 속에 살고 있는 동독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을 전시한 것을 계기로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갔고, 동독 시절 독일 현대 연극의 상징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마지막 제자였던 이력을 바탕으로 서독에서 세계적인 연출가로 거듭났다.  
 

아힘 프라이어

그는 “탈출에 대한 보복도 있었지만 동서독 모두를 경험한 것이 결국 좋은 영향을 주었다”면서 “모든 예술가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동독의 억압을 받았던 예술가들이 서독 예술에 영향을 주면서 독일의 예술 자체가 풍성해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에스더 리 단장도 “프라이어 연출은 히틀러 시대와 동독, 서독, 통일연방을 다 경험하며 꾸준히 예술세계를 지켜온 분이기에 남북한 가수가 이 무대에서 어울린다면 정말 좋은 그림이 될 것”이라며 “장차 북한 공연도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림책 찢고나온 듯한 동화적 무대

지난 9월 프레스 리허설 당시 프레야 역의 에스더 리 월드아트오페라단장과 함께

‘오페라계 피카소’로 불리는 프라이어의 무대는 기존 세트 개념을 넘어 설치미술 작품처럼 독립적인 완성도를 자랑한다. 모든 무대와 조명·영상·의상 디자인을 특유의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직접 완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대와 의상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유로운 붓터치는 그의 손길이 직접 닿은 흔적들이다. ‘수궁가’에서도 안숙선 명창을 높이 3m의 산 모양 치마 위에 올려 거대한 화폭으로 삼는 파격적 연출을 보여줬고, LA오페라극장과 독일 만하임극장에서 최근 공연한 ‘니벨룽의 반지’도 “무대와 이야기와 음악이 있는 그림”이라는 평을 들었다.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에 설치된 가설무대에는 이미 그의 예술관이 투영된 동화적인 세트가 거의 완성돼 있었다. 그림책을 찢고나온 듯한 화려한 의상과 인형극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마스크에는 상상력이 넘쳐났다. 실제 무대에선 바닥의 검정 천을 벗겨내면 거울에 조명을 반사시켜 반짝이는 라인강이 드러난단다. “황금 반지를 손에 쥔 난쟁이 알베리히가 능력을 과시할 때 로켓이 발사되고, 라인강에 햇빛이 비추는 장면에서는 세 요정이 반짝반짝 빛나는 치마를 입어 춤을 출 때 모든 것이 빛날 겁니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큰 성을 움직여야죠.”  
 

주요 캐릭터인 로게와 알베리히, 보탄(왼쪽부터)

그는 한국판 ‘반지’의 차별점에 대해 “러시아, 폴란드,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6번씩 완전히 다르게 연출했었다”면서 “‘반지’도 각각 전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다. 장소와 시간, 사회적 상황이 새로운 도전을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이 급하게 서구화된 것에 관심이 있고, 그런 생각을 담아 한국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 한다”고 했다.
 
‘니벨룽의 반지’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어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의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바이로이트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 6명이 가세하고, 랄프 바이커트와 마티아스 플레츠베르거라는 2명의 지휘자를 기용해 맹연습중이다. “많은 한국 음악가들이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나요. 세계 어느 극장에나 어울리는 분들과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어요. 한국 가수들도 환상적인 수준인데, 중요한 건 그들이 내 스타일 속에서 각자 개성을 살리는 것이겠죠.”
 

성악을 전공한 뮤지컬배우 양준모가 로게 역으로 출연한다.

우려도 있다. 인터미션 없는 160분 공연에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북유럽 신화를 따라가기 힘들지 않을까. 다행히 공연 전에 30분짜리 렉처가 준비된다. “‘니벨룽의 반지’는 설화와 신화로 만들어졌기에 해학적으로 풀었어요. 브레히트에게 ‘소외’가 중요하듯 바그너에게 ‘영속성’이 중요한데,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의 희망을 추구한 겁니다. 그리스와 북유럽, 아시아의 모든 신화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전혀 낯설지 않을 거예요.”
 
120억 제작비를 들이는 대장정은 BMW 등 독일 기업들의 협찬이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공연이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라면서 “후원, 홍보 등 끊임없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수행하는 작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고,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죠. 모든 극장 관계자들과 관객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길 바랍니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월드아트오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