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연출하는 아힘 프라이어
2일 오후. 옛 취수장 건물을 개조한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거대한 연습장에는 ‘니벨룽의 반지’ 런쓰루가 한창이었다. 커다란 철골 구조물에 로켓트·탱크가 달린 무대세트, 도르래에 걸린 링에선 서커스 묘기까지, 오케스트라만 없을 뿐 실제 공연과 다를 바 없는 규모였다. 검정색 생활한복을 입은 아힘 프라이어 연출은 가설 무대를 오르내리며 디테일을 살피고 있었다.
10월 한 달간 슈만의 오페라 ‘괴테 파우스트의 풍경’ 제작을 위해 독일 함부르크 극장에 머물렀던 프라이어 연출은 지난달 31일 바이로이트 가수 8명을 이끌고 귀국하자마자 리허설에 돌입했다. 노구에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당연히 힘들다”고 했다. “다행히 지난 여름 한 달간 리허설을 했기에 이번엔 집에 돌아오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은 한국 가수와 독일 가수들이 한가족처럼 잘 어울리며 연습에 집중하고 있답니다.”
“바그너 오페라의 주제들은 세계 공통의 토론거리이기도 합니다. 전쟁·환경·자연 및 우주 파괴 등이 ‘니벨룽의 반지’에 깔려 있는 테마죠. 바그너의 예술은 관객을 능동적인 주체로서 공연에 참여시킨다는 의미가 있어요. 시적인 영감을 극장으로 가져와 구현하면서 정치적 이슈까지 포함시켰죠. ‘라인의 황금’에서 사랑을 부정하는 자만이 황금을 차지한다는 설정은 모든 사회질서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 세계의 불행에 직면한 빈부 문제, 난민 문제 등이 다 포함돼 있죠.”
고대 북유럽 전설과 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에 기초한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제1부 (전야)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제2부 (제1야) ‘발퀴레(Die Walk<00FC>re)’, 제3부 (제2야) ‘지크프리트(Siegfried)’, 제4부 (제3야) ‘신들의 황혼(G<00F6>tterd<00E4>mmerung)’ 전 4악장을 바그너 혼자 대본을 쓰고 작곡했다. 탐욕으로 저주받은 반지가 저주에서 풀려나기까지의 여정과 그 반지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다. ‘악극을 통한 사회 개혁’이라는 바그너의 이상 아래 권력의 허망함, 인생의 덧없음 등 인간 삶의 보편적인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심각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관객 연령은 0~100세”라고 했다. 신들의 세계와 난쟁이 니벨룽족의 세계, 인간의 세계를 종횡무진 오가는 방대한 세계관을 ‘오페라계의 피카소’답게 이솝우화처럼 어린이도 즐길 수 있도록 풀어낼 예정이다. “물론 ‘반지’가 아이들만을 위한 공연은 아니죠. 어른의 동심을 깨우는 것도 극장의 의무입니다. 이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작품에 녹아있는데,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걸 배우게 될 거예요. 바그너 팬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이번 공연을 통해 그 시간이 단축됐으면 해요. 바그너를 잘 연출하면 3시간이 번개처럼 흐를 겁니다.”
동·서독 경험 집대성해 남북한 포용하는 무대 꿈꿔
그가 통일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베를린 미대를 졸업한 화가이기도 한 프라이어는 1972년 부자유와 압제 속에 살고 있는 동독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을 전시한 것을 계기로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갔고, 동독 시절 독일 현대 연극의 상징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마지막 제자였던 이력을 바탕으로 서독에서 세계적인 연출가로 거듭났다.
그림책 찢고나온 듯한 동화적 무대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에 설치된 가설무대에는 이미 그의 예술관이 투영된 동화적인 세트가 거의 완성돼 있었다. 그림책을 찢고나온 듯한 화려한 의상과 인형극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마스크에는 상상력이 넘쳐났다. 실제 무대에선 바닥의 검정 천을 벗겨내면 거울에 조명을 반사시켜 반짝이는 라인강이 드러난단다. “황금 반지를 손에 쥔 난쟁이 알베리히가 능력을 과시할 때 로켓이 발사되고, 라인강에 햇빛이 비추는 장면에서는 세 요정이 반짝반짝 빛나는 치마를 입어 춤을 출 때 모든 것이 빛날 겁니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큰 성을 움직여야죠.”
‘니벨룽의 반지’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어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의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바이로이트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 6명이 가세하고, 랄프 바이커트와 마티아스 플레츠베르거라는 2명의 지휘자를 기용해 맹연습중이다. “많은 한국 음악가들이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지 않나요. 세계 어느 극장에나 어울리는 분들과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어요. 한국 가수들도 환상적인 수준인데, 중요한 건 그들이 내 스타일 속에서 각자 개성을 살리는 것이겠죠.”
120억 제작비를 들이는 대장정은 BMW 등 독일 기업들의 협찬이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공연이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라면서 “후원, 홍보 등 끊임없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수행하는 작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고,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죠. 모든 극장 관계자들과 관객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길 바랍니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월드아트오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