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에 소주 들고 숨바꼭질 … 음주산행 ‘먹을래 vs 먹지마’

중앙일보

입력 2018.10.27 00:02

수정 2018.10.27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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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산행 단속반원을 피해 술을 마시려던 등산객들. [신인섭 기자]

지난 24일 서울 도봉구 도봉산 중상부의 마당바위. 마당바위는 풍광이 뛰어나 등산객들이 좋아하는 휴식장소로 유명하다. 이날은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저마다 싸온 김밥 등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남성 등산객 두 명이 족발과 소주병이 담긴 검은 봉투를 들고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자리를 펴고 앉아 술을 마시려는 참이다. 이들을 발견한 국립공원관리공단 북한산국립공원도봉사무소(이하 도봉사무소)의 최희원 주임이 그들에게 다가가 “산에서 술을 드시면 과태료 부과대상이 된다”고 주의를 줬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지못해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지만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단속 중인 도봉사무소 직원들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듯 했지만, 단속이 계속되자 이내 포기한 듯 소주 등을 가지고 자리를 떴다. 최 주임은 “음주산행 단속이 시작되면서 등산로가 아닌 외진 곳에서 술을 드시는 분들이 종종있다”며 “저분들도 결국 어디선가 술을 드실 텐데 경찰처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13일부터 과태료 부과
주의 받고 마지못해 자리 떴지만
외진 곳 찾아 마시는 경우 많아
주말 도봉산서만 평균 20팀 적발

“위험한 취중 산행 반대하지만
국가가 음주까지 규제하나” 반문도

 
40여 일간 부과된 과태료는 총 31건
 

등산로 곳곳에 쳐져있는 폴리스 라인. 폴리스 라인에는 ‘음주행위 집중 단속 중’이라 적혀있다. 이외에도 산 곳곳에는 음주산행 금지 안내문이 설치돼 있다. [신인섭 기자]

자연공원(국립·도립·군립공원) 내 음주가 금지됐지만, 음주산행을 즐기려는 등산객과 이를 막으려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 간의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다. 음주산행 단속의 근거인 자연공원법 시행령 개정안은 지난 3월부터 현장에서 적용 중이다. 6개월 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지난달 13일부터는 음주산행객에게 과태료가 부과된다. 1차 위반 시에는 5만원, 2차 위반 때부터는 10만원이다.


6개월 간의 계도기간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노력 덕에 술에 취한 등산객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산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최 주임은 “등산객이 몰리는 주말엔 도봉산에서만 하루 평균 20팀 이상이 단속반에 적발되곤 한다”고 전했다.
 
음주산행을 막으려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노력은 눈물겹다. 도봉사무소는 등산객이 몰리는 주말엔 산 곳곳에 직원을 배치해 음주산행을 막는다. 등산객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음주산행 금지 안내문과 ‘음주행위 집중 단속 중’이라고 적힌 노란색 폴리스 라인을 쳐놓기도 했다.
 
음주산행을 단속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음주산행 단속은 법적으로 행정 지도인 만큼 경찰처럼 강제로 음주 측정을 한다거나 짐을 뒤질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또 생수병에 술을 담아 와서 몰래 마시거나, 가방에 달린 스트로우 등을 이용하면 단속이 어렵다. 결국 등산객들의 협조가 필수다. 이날 최 주임은 단속에 앞서 ‘특별사법경찰’이라 적힌 신분증을 목에 걸었다. 신분증은 검찰이 발급했다. “무슨 권한으로 단속하느냐”는 일부 등산객과의 실랑이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취기가 오른 등산객과의 시비는 자주 벌어진다고 했다.
 
‘함정단속 아니냐’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등산객을 발견해도 곧바로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는다. 우선 “여기서 드시면 안된다”라고 경고한 뒤, 그래도 음주를 계속할 때 과태료를 부과한다. 단속반원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술을 마시는 등산객도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 그만큼 ‘술을 마시겠다’는 뜻이 강하기 때문이다. 도봉사무소 유길자 구조대장은 “가급적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산행 중 음주를 예방하려는 것이지 단속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단속도 술을 마시기 이전에 이를 예방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날 단속반원들은 하산길에 술에 불콰하게 취한 등산객을 만났지만 이들에게 과태료를 부과하진 않았다. 대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시라”고 계도를 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다보니 과태료 부과 건수가 생각처럼 많지는 않다. 지난달부터 이달 25일까지 40여 일간 전국 22개 국립공원의 음주산행 관련 과태료 부과 건수는 총 31건에 그친다. 이중 서울 지역인 도봉산과 북한산에서만 23건이 부과됐다. 지방 소재 국립공원(21곳)에서는 8건이 전부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실 이기석 담당관은 “지방 국립공원에 오시는 분들은 대개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 와서 일행끼리 산 아래에서 식사와 반주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산 정상부 주변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잦은 서울 지역과는 음주 패턴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취지 좋지만, 과잉 규제란 지적도
 

국립공원관리공단 유성철 자연환경해설사가 등산객들과 함께 가상 음주체험을 진행 중이다. 고글을 쓰면 시야가 흐려져 소주 한 병 정도를 마신 상태가 된다. [신인섭 기자]

음주산행 단속에 대한 등산객들의 반응은 갈린다. 이날 도봉산에서 만난 이만호(60)씨는 “산에서 술을 왜 마시나. 술에 취해 떠드는 사람을 보면 나부터도 싫다”며 음주단속을 반겼다. 하지만 유병호(59)씨는 “기본적으로 술에 취해 산을 오르는 일에는 반대지만, 그래도 친구끼리 공기 좋은 곳에서 막걸리 한 두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음주산행 단속에 나선 건 안전사고를 줄이기 위함이다. 2012~2017년 국립공원에서 음주로 인해 발생한 안전사고는 64건으로 이 기간 전체 안전사고(1328건)의 4.8%를 차지했다. ‘정상주’로 대변되는 음주산행 문화도 이번 기회에 바로 잡겠다는 목표도 있다.
 
하지만, ‘음주산행 금지’까지 정부가 규제를 통해 나설 일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갈린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김순은 교수는 “음주산행 단속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런 일까지 정부가 규제로 제어해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며 “정부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한다고 보는 이들이 많으니 정부는 더 커질 수 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한 편에서는 규제개혁을 요구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2년에도 국립공원 내 음주시 과태료 부과를 추진하다가 ‘과잉 규제 아니냐’는 지적 등으로 무산된 바 있다.
 
현행법상 자연공원 내에서 음주산행을 단속할 수 있지만, 자연공원이 아닌 산 등에서는 술을 마셔도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점도 한계다. 자연공원법은 ‘국립공원·도립공원·군립공원(郡立公園) 및 지질공원’을 자연공원으로 규정한다. 도봉산은 북한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음주산행 단속이 가능하지만 인근 노원구 불암산은 음주산행을 해도 단속할 근거가 없다.
 
등산로 주변 상인들은 내심 규제를 꺼린다. 익명을 원한 한 상인은 “음주산행이 나쁘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단속 이후부터 매출이 10~15% 가량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주요 등산로 인근 숙박업소들까지 매출이 줄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최희원 주임은 “등산객들이 산에서는 안전하게 숲을 즐기시고, 하산하신 뒤에 술을 즐기셨으면 좋겠다”며 “1990년대 초 국립공원 내 취사와 야영이 금지됐을 때처럼 머지않아 산행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쪽으로 등산문화가 바로 잡힐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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