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궁궐의 품격과 퓨전 한복

중앙일보

입력 2018.09.29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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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논설위원

드레스처럼 부풀리거나 짧은 치마, 금박이나 레이스, 리본 장식. 이런 퓨전 한복을 입으면 더 이상 고궁 무료입장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서울 종로구청의 방침이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종로구청은 이달 초 국적 불명 한복의 전통 파괴를 우려하며 문화재청에 ‘한복 무료관람 가이드라인’ 변경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2013년 도입된 ‘한복 착장 고궁 무료입장’ 제도는 한복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한복을 입고 고궁을 찾은 이가 63만명이다.
 
여론은 양분됐다. ‘꼰대 발상’‘전통 수호’가 맞섰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24일 인터뷰를 통해 “그런 옷을 입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걸 한복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얘기”라고 못 박았다. 이에 앞서 17일 서울시 산하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한 ‘궁 나들이’ 패션쇼에는 패션 전공 대학생 100여명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퓨전 한복들이 대거 선보였다. 문제가 된 리본, 레이스 장식이 등장했다. 전통 대 퓨전을 놓고 종로구청과 서울시의 입장이 묘하게 엇갈렸다.

논란 낳은 고궁 무료 입장 불허는
의상에 대한 권위적 발상 아닌가

익히 지적된 바이지만, 어디까지가 전통이고 어디부터가 아닌지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다. 디자인과 재단에서 한복을 규정하는 요소들을 꼽을 수는 있지만, 그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했고, 고구려와 조선의 한복이 다르다. 지금 전통 한복이라고 떠올리는 모습도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할 때 들어온 몽골풍 복식이다.
 
더 큰 문제는 한복 나들이 문화에 대한 몰이해다. 관람객 중에는 외국 관광객 아닌 우리 젊은이들도 많은데, 이들에게 고궁 나들이는 일종의 ‘코스튬 플레이’다. 만화나 영화 주인공 의상을 차려입고 사진으로 남기는 놀이문화다. 당연히 화려해서 ‘사진빨’이 좋은 퓨전 한복을 선호한다. 이들에게는 고궁 또한 전통과 역사의 현장이라기보다는 코스튬 플레이의 무대, 한마디로 ‘조선 테마파크’ 같은 곳이다.
 
현재 문화재청의 ‘한복 무료관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생활 한복은 허용되지만, 남녀가 성별을 바꿔 입을 수 없으며, 남자의 경우 두루마리만 입는 것은 불허이고, 남녀불문 궁궐의 품격에 어울리는 한복 착용 권장’이라고 돼 있다. 고궁이란 곳이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맞지만 종교시설도 아니고, 지금이 왕조시대도 아닌데, ‘궁궐의 품격’을 드레스 코드로 제한한다? 설마 21세기 관람객에게 왕의 거처이니 예를 갖추라는 얘기인가.


싸구려 재질에 번쩍거리는 대여용 퓨전 한복보다 우아한 전통한복이 훨씬 격조 있고 아름답다. 모르는 이 없다. 하지만 그건 미 의식의 문제이고, 어떤 옷은 되고 안되고 규제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또 진짜 한복 대중화를 원한다면 전통은 전통대로, 변형은 변형대로 투 트랙이 정답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서울 시내 중고생에게 두발 자유화 조치가 추진된다. 늦었지만 잘된 일이다. 최소한의 선만 지킨다면 애든 어른이든, 옷이든 머리든, 제 몸에 대한 통제권은 자기가 갖고, 의상은 개인의 취향으로 서로 존중하는 게 최선이다. 개인의 자율성도 거기서 출발한다. 아무리 헐벗은 차림이라 해도 그건 그녀의 자기표현일 뿐, 야한 옷이 성폭력을 유발했다고 피해자 탓하지 않는 사회가 진일보한 사회인 것과 마찬가지다. 비슷한 논리로, 근엄한 왕의 처소가 요상하게 차려입은 10대 소녀들이 또래문화를 수행하는 배경으로 전락했다 해서 궁의 품격이 훼손되거나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인이 된 이후 한복을 입은 횟수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한복의 멋을 모르는 바 아니나 어느덧 일상에서 즐기기에는 무리인 행사 의상이 돼버렸다. 그나마 2~3벌 한복을 어디에 모셔두었는지, 처박아두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이렇게 고수되는 전통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