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가을이 오나 싶지만, 패션계는 이미 월동 준비에 들어갔다. 폭염이 이어지던 지난 7·8월부터 패딩은 주요 쇼핑 아이템이 됐다.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에 따르면 패딩 거래액은 8월 한 달 전년 동기 대비 222%나 늘었다. 특히 패션에 민감하고 구매력 있는 3040 여성 거래액이 500% 이상 상승했다.
10월 말 한파 예보에 롱패딩 불티
폭염 탓에 초미니 남자 바지 등장
자연 재해 모티브 삼은 소방복도
날씨 변덕, 패스트 패션 시대 열어
특히 롱패딩이 패딩 전체를 대변할 만큼 압도적으로 반응이 좋았다. 8월 한 달 포털사이트 네이버 패션 검색어 순위에서도 아예 ‘롱패딩’이란 단어가 4위에 올랐다. 올 초 업계에선 “지난해 평창 패딩으로 대표되는 롱패딩이 큰 인기를 끌면서 유행이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시장 반응은 정반대로 간 것. 디스커버리 이종훈 전무는 “요즘엔 소비자가 트렌드를 스스로 이끌다 보니 롱패딩을 넘어 ‘롱롱패딩’으로 길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방한이라는 목적이 뚜렷해지면서 패딩을 고를 때 브랜드부터 따지던 과거와 달리 얼마나 따뜻한가도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고 있다. 직장인 이경민(38)씨는 “길이는 무릎을 넘는지, 소매가 밴드로 조여지는지, 모자는 있는지 등을 따지게 됐다”면서 “영하 20도 가까운 추위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치 미세먼지 탓에 필수품이 된 마스크나 강한 자외선을 피해 들게 된 남자 양산, 그리고 쿨비즈로 대표되는 출근복 반바지처럼 말이다.
생존·보호의 패션 ‘서바이벌 시크’
그러자 글로벌 패션 브랜드도 기후 변화와 이에 따른 재해를 컬렉션에 속속 반영시키고 있다. 인간의 생존과 보호를 테마로 삼는 패션을 두고 업계에서는 ‘서바이벌 시크(survival chic)’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프리미엄 패딩으로 유명한 몽클레르가 이번 시즌 외부 디자이너들과 협업한 ‘지니어스 프로젝트’를 보자. 그중 영국 디자이너 크레이그 그린과 만든 패딩은 아무리 강한 바람이라도 몸속으로 절대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은 완전 무장이다. 물놀이 때 입는 안전 조끼가 연상되는 듯한 디자인에서 다시금 ‘생존’의 키워드가 연결된다.
추위를 견뎌낼 생존템이 패딩뿐일까. 올 가을·겨울 주요 브랜드들의 컬렉션에서는 눈에 띄는 소품이 등장했다. 바로 바라클라바(balaclava), 즉 머리부터 귀와 턱까지 가리며 뒤집어쓰는 복면이다. 캘빈클라인·구찌·마틴마르지엘라 등 럭셔리 패션 하우스는 물론 프린·어콜드월 등 신진 디자이너들까지 이 겨울 소품을 등장시켰다. 지난 시즌엔 귀를 가리는 모자 테퍼햇을 선보이더니,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셈이다.
생존템까지는 아니지만 극한의 추위·더위보다 더한 자연 재해를 모티브로 삼은 옷도 눈길을 끌었다. 캘빈클라인·와타나베 준야 등은 소방관·구조대의 유니폼과 흡사한 재킷을 연이어 선보였다. 패션쇼 무대마저 먼지에 뒤덮인 폐허를 연상시키면서 음울한 미래의 패션을 떠올리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기후변화, 패션 업계에도 큰 악재
극한 날씨에 맞서는 패션이 속속 나타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상품을 제때 만들고, 또 사고팔 수 있는가다. 패션은 원단 컬러까지 고려하면 2년을 앞서 상품 기획에 들어가는 업종이다. 트렌드를 제시하는 컬렉션만 해도 6개월을 앞서 열린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맞춰 어떤 물건을, 얼마큼 내놓느냐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지난해 겨울만 해도 불과 두 달 전까지 ‘따뜻한 겨울’을 예고했다가, 1월 이후 한파가 시작되면서 롱패딩 물량 조절에 실패한 사례가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한파를 대비해 선구매를 했다가 날씨 예측이 틀리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소비자도 업체도 리스크를 떠안는 셈이다. 기후 변화가 농작물만이 아닌 패션계에도 큰 악재가 되는 이유다.
국내 업체들은 아직까지 날씨 분석업체의 정보를 기반으로 상품을 기획하고, 냉감·발열 소재 개발에 비중을 둔다. 반면 해외에서는 1~2년 전부터 업계 내부에서 대안과 논의가 시작됐다. 기후 예측의 정확성에 기대는 대신, “예측할 수 없다”를 전제로 생산·유통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래학자이자 테크 컨설턴트인 스티븐 J 하우스만은 패션매체WWD와의 인터뷰에서 ‘인 시즌(in-season) 패션’을 제안한다. 지금처럼 계절을 앞서 대형 컬렉션을 열고 신제품을 출고하는 게 아니라, 소규모 컬렉션과 소량의 신제품을 날씨에 맞춰 그때그때 내놓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시 나우, 바이 나우(see now, buy now)’다.
이를 효과적으로 진행하려면 현재 패스트패션 업체들처럼 생산과 동시에 판매로 연결되는 ‘현장 생산(on-the-spot manufacturing)’ 시스템이 효율적이다. 트렌드 분석업체 트렌드랩 506 이정민 대표는 “지금의 패스트패션이 유행 디자인을 그때그때 반영하는 의미라면, 앞으로는 날씨에 맞춰 상품을 빠르게 내놓는 제2의 패스트패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