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1943년 테헤란회담의 빅 스리 외교기법
미·영·소련 정상들 테헤란에서
독일 격퇴엔 결속했지만
루스벨트, 처칠을 견제했고
파트너로 삼은 스탈린에 당해
나누고 쪼개는 스탈린 노하우는
‘미국 다루기’ 솜씨로 북한에 전수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공항은 낯설다. 도시의 색깔은 무겁다. 여성의 차도르는 검은색이다. 도시의 내면은 다른 색이다. 이란은 페르시아다. 찬란한 문명, 장구한 역사다.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다. 하지만 아랍이 아니다. 종족·언어가 다르다. 국립박물관에 가면 테헤란과 친숙해진다.
전세는 연합국 우세다. 1943년 11월 28일 테헤란회담 무렵이다. 그해 2월 스탈린그라드(러시아 볼고그라드) 전투는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스탈린의 소련은 히틀러의 독일을 격퇴했다. 동부전선의 독·소전은 나치즘 대 공산주의 충돌이다. 잔혹한 독재자들의 결투는 참혹한 유혈극이었다.
테헤란의 러시아 대사관은 넓고 크다. 나의 테헤란회담 현장 방문은 한국 언론으론 처음이다. 대사관 경내를 차로 이동했다. 작은 호수를 지나니 메인 빌딩이다. 대사관 직원이 ‘역사적 기념 유산’이라고 했다. 나는 빛바랜 사진을 꺼내 보았다. 스탈린은 소련군 대원수 차림이다. 처칠은 공군 장군 복장. 영국 공군은 나치 공군의 본토 공략을 막아냈다. 그 자부심이 드러난다. 옛 건물은 살아있다.
간소, 중후한 기본 골격은 그대로다. 건물 위쪽이 달라졌다. 삼각형 페디먼트가 없어졌다. 거기에 소련 문양(낫과 망치)이 과시하듯 새겨져 있었다. 대사관 직원은 “1990년대 소련 해체 후 문양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페디먼트도 철거됐다”고 했다.
그때 독일군의 암살작전 루머가 퍼졌다. 경호에 비상이 걸렸다. 루스벨트는 거처를 소련대사관으로 옮겼다. 영국 공사관은 소련대사관의 길 건너편. 공간 압축은 회담의 효율성을 높였다. 하지만 도청이 있었다. 그것은 스탈린의 비밀병기다.
그 사연들은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을 떠올린다. 회담의 미국 대표는 C. 터너 조이 제독. 회담은 그에게 좌절과 고뇌였다. 그는 그 경험을 책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에 옮겼다. “그들은 세심하게 무대를 설정(stage setting)한다. 유리한 협상조건을 만들기 위해 물리적 환경을 고려한다.” 회담 장소는 개성이다. 중국과 북한이 제안했다. 공산군 통제 아래 있었다. 미국은 뒤늦게 장소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북한 지도자들의 이동수단은 열차다.
둥근 테이블에 세 나라 깃발이 꽂혔다. 짧은 개막 연설이 이어졌다. 스탈린은 “역사는 우리에게 위대한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공산주의 언어는 서사시적 요소를 담는다. 그 힘으로 시선을 잡는다. 6·12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도 그랬다.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어휘는 상투적 인사말이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다가갔다. 미국 역사학자 조지 맥짐시는 “루스벨트가 생각한 국제건축물의 쐐기돌(keystone)은 소련이고 영국은 부차적 존재였다(『the Presidency of FDR)』).” 루스벨트의 정책은 뉴딜이다. 뉴딜은 해체와 개혁, 공동번영이다. 뉴딜은 성공했다. 그는 그것을 국제정치에 투사했다. 개혁 대상은 유럽 식민주의다. 그에게 처칠은 제국주의자였다. 처칠은 대영제국의 해체를 거부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루스벨트는 뉴딜의 이상주의적 설득력을 과신했다. “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인다면 스탈린은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할 것이다(영국 역사가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 그것은 오판과 환상이었다. 그의 주변에 좌파·진보주의 참모들이 포진했다.
스탈린은 속임수의 천재다. 그의 정체는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그는 공포와 음모의 통치자다. 10대 시절엔 시인이고 신학교 학생이었다. 러시아사 전문가인 로버트 서비스의 저서(『스탈린』)는 이렇게 분석한다. “스탈린은 모든 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면은 드러내고 감춘다. 그는 자신을 나누고 다시 쪼개는(divide and subdivide)능력을 가졌다.” 그는 루스벨트의 허영심을 회유와 압박 도구로 재활용했다. 북한의 협상술은 벼랑 끝과 살라미다. 북한은 비핵화의 의미를 쪼갠다. 실천 과정을 나눈다. 미국은 그 수법에 당하고 있다.
처칠은 스탈린의 야욕을 견제했다. 그는 노련했다. 발언권은 약해졌다. 외교는 국력의 연장이다. 미국의 존재감은 확고했다. 미국은 전쟁 물주다. 소련·영국에 군수품을 대량 지원했다. 독일의 결정적 패퇴는 소련의 저항력 덕분이다. 소련군 희생자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영국은 하위(junior)파트너로 떨어졌다.
나흘 뒤 회담이 끝났다. 루스벨트는 득의에 찼다. 하지만 1년3개월 뒤 얄타회담에서 환경이 달라졌다. 스탈린의 탐욕은 거칠어졌다. 루스벨트는 쇠약해졌다. 그는 새로운 제국 소련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 그는 죽기(45년 4월) 전에 탄식했다. “스탈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더 이상 같이 일을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