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배우 오용·이형훈
그런데 연극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9월 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제국주의와 냉전시대 핵무기 개발 등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20세기를 거쳐 연대와 상생, 공동체의 시대인 21세기로 변모해 가는 거대한 세계사의 소용돌이를 한 평범한 인간을 통해 펼쳐 보인 기발한 소설의 매력을 고스란히 연극 언어로 번역해 냈기 때문이다. 비좁은 소극장에서 방대한 시공간의 스케일을 대신하는 건 오직 배우 다섯명의 ‘피, 땀, 눈물’이다. 연극이란, 아니 세계사란 결국 사람의 연대로 만들어내는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배우 오용(45)과 이형훈(32)을 만났다.
아날로그적 방법으로도
새로운 메시지를 줄 수 있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게
연극이라 생각하거든요
이런 괴물 같은 작품을 어떻게 만들었나 싶지만, 다른 연극과 똑같이 한달 반 가량 걸렸단다. 다만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점이 다르다. ‘카포네 트릴로지’ ‘더 헬멧’ 등 튀는 연극을 만들어온 지이선 작가·김태형 연출 콤비는 큰 틀만 짜 놓고 배우들을 불렀다. ‘고급스런 유럽식 유랑극단’ 느낌으로 ‘캐릭터 저글링’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묘기를 통해 관객에게 알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컨셉트다.
“처음엔 이런 작품이라곤 전혀 예상 못했죠. 100세 알란만 할 줄 알았는데 하루 지날 때마다 역할이 늘어나더군요. 다들 역할 분배가 안 된 상태로 시작해서 이것저것 일이 점점 커졌어요. 연습을 할수록 대책이 안 생기게 된 거죠.(웃음)”(오용)
“대본 제본도 여러 번 하고 돈이 많이 들었어요. 거의 다 만들어놓은 걸 막판에 뒤집어버리기도 하고 . 나중에는 ‘어차피 또 바뀔텐데 굳이 돈 아깝게 제본을 해야 되느냐’며 쪽대본을 집게로 찝어서 봤죠.”(이형훈)
- 연습과정이 남달랐겠어요.
오 연습 기간이 정말 짧게 느껴졌어요. 준비된 건 없는 것 같은데 공연이 임박했더라고요. 다들 불안해했죠. 더블 캐스팅인 서현철 선배님도 ‘이러긴 정말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첫 공연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음 장면이 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어요.
“무대 의상에 땀이 다 마르기도 전에 다음 공연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많은 작업이지만, “희한하게 힘들어도 즐겁다”는 게 이들의 이구동성이다.
“퇴장이 거의 없으니 백스테이지에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마실 정도로 난리도 아니죠. 하지만 그렇게 땀 흘리며 캐릭터 저글링을 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즐겁고 매력적이에요. 아주 유니크하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라 고통스러웠지만,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나오니까요. 재밌기만 하고 쉬운 작품은 별로 기억에 안남아요. 찰리 채플린 연기가 처절한데도 웃기고 재미있는 것처럼, 우리 작품도 배우들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도 충실하고 진정성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즐거운 게 아닌가 싶어요.”(오)
가끔은 인생에 무책임해도 괜찮아
“우리에게 중요한 건 누가 어떤 배역이냐가 아니라 알란의 삶을 따라가는 시간의 흐름이거든요. 성별에 상관없이 우린 다 알란이고, 알란 이야기를 하는 장치일 뿐이죠. 한 인격체 안에 다양한 감정을 구분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과도 비슷해요. 우리가 다 모여서 최종적으로 알란이 되는 거죠.”(이)
“코끼리 소냐를 포함해 모두가 알란의 인생을 만든 일부고, 관객 여러분도 누구나 알란일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한다고 할까요.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거죠.”(오)
사람 뿐 아니라 동물 캐릭터까지 골고루 나눠맡고 깨알같은 소품으로 표현하지만, 가장 소중한 존재인 고양이 몰로토프는 유독 투명 고양이로 처리된다. “관객에게 다 그런 존재가 있으니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죠. 각자의 몰로토프를 떠올리면 되는데, 원작엔 그냥 스쳐지나가는 존재인 고양이를 부각한 게 지이선 작가의 ‘한 방’인 것 같아요. 유일하게 사랑만 주던 몰로토프의 환영을 보며 촛불에 초 하나 켜는 장면을 향해 몰고가는 느낌이랄까. 100년의 삶을 이대로 마칠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거죠.”(이)
- 100세 노인이 겪은 현대사를 직접 훑으며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이 알란 혼자가 아니라 격동의 세계사를 겪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엄마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돼 있으니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오 알란을 보면 가끔은 인생에 무책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지키려고만 할 게 아니라, 흐르는 대로 두면 어떤가요. 웃으며 살면 좋겠어요. “평화는 말야, 백 자루의 총으로 오는 게 아니라 한 잔의 술을 나눌 때 오는 거더라구”라는 알란의 대사도 있지만, 술을 나눈다는 게 마음의 벽을 허문다는 거죠. 핵으로 싸울 게 아니라 대화로 해결해보려는 시대가 왔잖아요.
- 상생과 연대의 메시지와 극도로 아날로그한 무대가 잘 어울리던데요.
오 일일이 이름표 붙이고 소품 동원할 게 아니라 영상을 쓸 수도 있을텐데, 세련된 것보다 이런 아날로그적 방법으로도 새로운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연출이 생각한 것 같아요. 저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게 연극이라 생각하거든요.
이 매일 똑같은 영상을 배경으로 틀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사람이 하기에 같은 대사를 하면서도 다른 상황이 발생하잖아요. 그럴 때 미묘한 에너지가 생겨나죠. 언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즉흥성이 연극의 매력인 것 같아요.
오 사람 사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앞 일을 너무 다 알면 재미 없잖아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연극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