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상황에서 야권은 6개월간 수도 이슬라마바드를 마비시킬 정도로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대법원은 2017년 7월 샤리프에게 총리 자격 정지 판결을 내렸다. 그는 즉각 사임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부인이 투병 중인 영국 런던에 머물러왔다. 파키스탄 반부패법원인 국가책임원(NAB)은 사임 1년 뒤인 지난 6일 궐석재판에서 혐의를 인정해 그에게 징역 10년, 딸 마리암에게 7년, 사위 샤프다르에게 1년을 각각 선고했다. 별도로 샤리프 가족들에게 총 1000만 파운드(약 148억원)의 벌금을 물리고 영국 내 부동산 압류도 명령했다.
2016년 재산 해외 도피 의혹 나와
야권 격렬 시위 6개월 만에 사임
“카타르가 빚 갚은 것” 해명 했지만
대법원, 궐석재판서 징역 10년형
30년간 집권·낙마 세 차례 ‘오뚝이’
총선 앞두고 정치 음모설 나와
현재 파키스탄 하원에선 중도우파·친서방·이슬람보수주의의 PML-N이 전체 의석 342석 중 166석을 차지하며 범야권을 포함하면 과반수 의석을 확보 중이다. 이에 도전하는 제1야당인 좌파 파키스탄 인민당(PPP)은 의석이 42석에 불과하다.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 대표는 29세의 세습 정치인이다. 2007년 암살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아들이자 79년 군사쿠데타 세력에 처형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외손자다. 좌파 정당을 세습 정치인이 이끄는 아이러니다. 35개 의석으로 제2야당 PTI를 이끄는 칸 대표는 영국 옥스퍼드대 우등졸업생으로 이 나라 최고 인기 스포츠인 크리켓 국가대표팀에서 선수로 20년, 주장으로 10년을 활약했다. 92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파키스탄의 첫 우승을 이끈 국민 스포츠 영웅이지만 정치력을 보여주진 못했다. 미래보다 과거에 의존하는 회고형 정치인 셈이다.
사실 철강 기업인 출신인 샤리프는 30년 이상 정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치 오뚜기’다. 3차례 총리를 지내면서 한 번도 임기를 못 채울 정도로 심한 견제를 받아왔다. 62년 설립된 우파정당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PML)이 88년 8월 신헌법을 둘러싸고 분열한 뒤부터 최대 파벌인 PML-N을 이끌어왔다. N은 나와즈파를 의미한다. 샤리프의 정치적 비중을 보여주는 사례다. 샤리프는 90년 처음 정부 수반인 총리에 올랐지만 93년 4월 국가원수인 굴람 이샤크 칸 대통령(88~93년 재임)의 정부 해산 명령으로 물러나야 했다. 다음 달 대법원이 대통령 명령을 권한 남용으로 판단해 무효로 하면서 총리에 복귀했지만 7월 군부 중재로 대통령과 동시에 물러나는 조건으로 사임했다.
샤리프는 97년 총선에서 승리해 2차 임기를 시작했다. 재임 중이던 98년 5월 초 인도가 5발을 터뜨리는 핵실험을 하자 샤리프는 그달 말 6발의 핵실험으로 단호하게 맞대응해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의 무혈 쿠데타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이 나라 정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 뒤 무샤라프의 운명이다. 2001년 대통령에 올랐지만 2008년 집권한 좌파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유사프 라자 길라니 총리가 탄핵을 압박하자 사임했다. 그런 길라니도 자당 소속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와 아시프 자르다니 대통령의 부패 재판에 반대하다 법원으로부터 법정모욕죄로 2012년 유죄 판결을 받고 총리와 하원의원에서 퇴출당했다. 샤리프의 총리 퇴출과 재판도 단순한 부패 척결로만 간주하긴 힘들고 이러한 파키스탄 정치의 ‘어두운 흐름’의 연속 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샤리프는 2013년 총선에서 PPP를 누르고 권좌에 복귀했다. 영국 BBC방송 보도에 따르면 47년 이 나라 독립 이후 유례 없는 3차례 총리 재임이자, 선거로 집권한 정부끼리 정권을 서로 인수·인계한 첫 사례다. 그런데도 샤리프는 대법원 판결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반부패법원 판결로 감옥까지 가게 됐다. 가디언은 샤리프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은 딸 마리암이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간주돼 왔음도 지적했다. 이 나라에선 권력에 대한 사법 정의 실천과 정치 보복·음모의 구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