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아이돌 파워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의 스튜디오 문을 열자 아이돌 그룹 모모랜드의 노래 ‘뿜뿜’이 울려퍼진다. 경쾌한 멜로디에 맞춰 강사는 “두 손을 모으고 음악에 맞춰 골반을 가볍게 흔드세요”라고 영어로 설명했다. 아이돌 그룹 백댄서 출신 강사의 동작을 따라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수강생들은 일본에서 온 60대 주부다.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인 ‘리얼K팝댄스’에 참가한 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마유미 히라하로(62)는 “평소에도 슈퍼주니어랑 EXO를 좋아해 뮤직비디오를 자주 보는데 실제로 K팝 댄스를 배울 수 있어 신나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김민성 리얼K팝댄스 대표는 “2016년 첫선을 보였는데 한국 아이돌의 인기가 많아지면서 최근에는 매달 100여 명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한국 연상 이미지, 한식보다 K팝
‘아이돌처럼 살아보기’ 상품 등장
스타 가까이서 보려 유학 오기도
미국·브라질·중동 팬덤 눈덩이
한국 쇼핑몰서 굿즈 역직구 급증
국내 서점가 ‘아이돌셀러’ 불티
“K팝 춤 배울래요” 일본 60대 주부들 몰려
유학 시장에서도 아이돌은 보증수표나 다름없다. 지난 26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 언어교육원에서 만난 중국인 유학생 윤만예(20)는 “좋아하는 방탄소년단이 중국에서 활동하지 않아 가까이에서 보고 K팝 댄스도 전문적으로 배우려고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국인 유학생 부설요(24)는 “학교가 SM이나 YG랑 가까워 선택했다”고 말했다. 10년 전부터 슈퍼주니어 팬이었던 그는 콘서트를 보기 위해 한국을 오가다 2년 전부터 아예 한국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성목 중앙대 사회교육처 국제교육팀장은 “아이돌의 영향으로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어를 배우러 온 유학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학기에 최대 1000명까지 수업을 받는데 70%가 중국인”이라며 “최근 1년 새 베트남 학생이 눈에 띄게 늘었고, 미국이나 브라질·유럽에서도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통 1년 정도 걸리는 한국어 과정을 마친 뒤 대학교까지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온 아잉(22)은 한국어 정규 과정을 마친 뒤 중앙대 경영학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부모는 영어권인 호주나 캐나다를 권했지만 그가 한국을 고집했다. 아잉은 “어린 시절부터 슈퍼주니어·빅뱅의 음악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주로 봤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게 너무 좋다”며 “졸업하면 한국 연예인 기획사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서 K팝을 선호하는 데는 후렴구에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특징인 후크송(Hook song) 영향이 크다. 중독성 강한 후렴구와 리듬이 한번 들으면 계속 귀에 맴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샤이니의 ‘링딩동’은 수능시험 전날 피해야 할 ‘수능 금지곡’으로 유명하다. 후렴구의 ‘링딩동 링딩동 링 디기디기딩딩’이 반복돼 한번 들으면 계속 떠올라 시험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충성도와 중독성을 바탕으로 K-아이돌은 관광·출판·유학·유통 등 다양한 분야를 엮는 낚싯바늘(후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중독성 강한 후크송, 다양한 분야 엮어
김예구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BTS 관련 영상 콘텐트를 분석해 보니 베트남·일본·필리핀은 기본이고 미국·브라질·멕시코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BTS 관련 영상은 해외에서 미국이 5억4300만 건으로 조회수가 가장 많았고, 브라질과 베트남에서 3억 건 이상 시청됐다. 이선정 유튜브 한국·중국·대만·홍콩 음악파트너십 총괄상무는 “최근엔 해외 팬들이 아이돌의 영상을 시청하는 것을 넘어 뮤직비디오 해설 영상, 뮤직비디오를 본 느낌을 표현하는 리액션 영상 등을 제작하며 적극적으로 K팝을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소비자가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 상품을 구입하는 역직구 쇼핑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해외 팬들이 아이돌 사진으로 만든 티셔츠·머그잔·열쇠고리 같은 굿즈(Goods)를 구매하기 위해 지갑을 연다. 지난해 9월 오픈한 SK플래닛 11번가의 역직구몰 ‘글로벌11번가’는 최근 3개월 동안(3~5월) 거래액이 개장 직후 3개월 대비 150% 이상 상승했다. 아이돌 굿즈를 가장 많이 사들인 곳은 대만(30.7%)이었다. 대만 고객들은 주로 슈퍼주니어·샤이니·동방신기·블랙핑크 등의 굿즈를 구매했다. 2위 일본에선 은지원, 3위 미국에선 갓세븐이 인기를 끌었다. 인기 품목으로는 응원봉을 비롯해 포토카드, 티셔츠, 여권케이스 등 패션 잡화가 꼽혔다.
아이돌 열풍은 음반뿐 아니라 출판시장에도 영향을 준다. 아이돌이 읽거나 방송에서 언급한 책들이 줄줄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아이돌셀러’라는 말도 생겼다. 걸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팬미팅에서 최근 읽은 책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언급한 뒤 일주일간 판매량이 전주보다 172% 뛰었다. 이뿐이 아니다. 아이돌을 인문학적으로 분석한 책 『BTS를 철학하다』 『BTS 예술혁명』 『아이돌을 인문한다』 등이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손민규 예스24 인문·사회 담당자는 “해외에서 들뢰즈나 지제크 같은 철학자들이 영화·팝 등 대중문화를 분석하듯 한국에서도 아이돌의 인기를 사회구조적 시선으로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