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들고 길에서 5년 "집도 팔았죠. 세상이 내 집인데"
2013년 1월 40여 년 커리어를 뒤로 하고 은퇴한 마이클(73)과 데비(63) 캠벨 부부의 주요 자산들이었다. 스무살 첫 직장을 얻어 스포츠 프로모터로 일해 온 마이클, 어린 나이부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아 온 데비는 냉장고 문에 ‘버킷 리스트’를 붙여 두고 은퇴 기념 첫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어느 날 여행지 목록을 유심히 보던 딸은 “이 정도면 아예 민박하면서 장기 여행을 해도 될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캠벨 부부는 당장 에어비앤비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받고 통역 앱 사용법을 익혔다. 미국 시민이 해외에서 비자 받는 법, 국경을 이동할 때 주의점들을 숙지하고 나니 떠날 준비가 얼추 돼 있었다. 요트와 자동차를 팔고 집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대로 새로운 삶, 노마드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같은 해 7월 첫 여행지는 프랑스 파리.
“당시엔 무엇을 볼지 다 정해 뒀죠. 계획 세우기가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이에요. 우리는 '원숭이 퍼즐(monkey puzzle)'이라고 부르죠.”
여행가방 두 개, 베개 두 개, 16권째 여행 노트.
2018년 5월 말, 78번째 여행 국가로 한국을 방문한 캠벨 부부가 지니고 있는 자산들이다. 지난 5일 중앙SUNDAY와 만난 캠벨 부부는 한국에 대해 할 이야기가 이미 한 보따리였다. “2호선 녹색선에 ‘에이치(H)’로 시작되는 대학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음식을 주문해야 하는데 선택해야 할 게 너무 많아 어찌나 어렵던지요.” 데비는 웃으며 쉴 새 없이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세계 260여 개 도시를 방문하며 얻은 경험치는 5년 전과 비교할 게 아니다. 우선 에어비앤비로만 1000일 이상을 묵어 ‘수퍼 게스트’에 등극했다. 뉴욕타임스 서평란에 실린 책(『Your keys, Our home』)의 저자가 됐고, 인기 여행 사이트(seniornomads.com)의 주인장이 됐다.
“6개월만 시험적으로 해보기로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시애틀에 그냥 있었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처음 계획했던 6개월이 지나자 부부는 계획을 연장하고 집도 처분했다. 유럽을 돌고 아프리카 중동을 지나 뉴질랜드 호주를 거쳐 아시아로 들어왔다.한국 다음 목적지는 일본이다. 올여름에는 다시 프랑스와 유럽을 돌고 캐나다를 거쳐 10월에는 시애틀에서 결혼 4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그 다음은? “78개국을 봤지만 아직도 못 가 본 곳이 너무 많아요. 10월 이후엔 브라질로 향할 것 같네요.”
은퇴 뒤 집 떠나 78개 나라 방문
그냥 살아도 쓸 돈으로 여행
가방ㆍ베개ㆍ노트가 지금 가진 전부
"말린 문어 먹으려다 실패
젊은이들 넘치는 홍대 앞 좋아요"
서울 서교동 주민 캠벨
부부는 자칭 타칭 ‘시니어 노마드’, 그러니까 은퇴 유목민이다. “우리는 여행하는 게 아니에요. 길 위에 우리 집이 있을 뿐이죠.”
유명 관광지를 보겠다고 무리하지 않고 여행자의 속도가 아닌 생활인의 속도로 움직인다. 빨래와 요리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인근 종교시설을 구경하면서 같이 예배도 보고 주민 대상 무료 이벤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얼마를 머물든지간에 그 동네에 스며든다.
물론 포기한 것도 있다. 이들 부부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어차피 하나를 사면 하나를 짐에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저가항공을 이용하고 외식도 거의 하지 않고 숙소에서 밥을 해먹거나 간단히 거리 음식으로 때운다.
마이클은 “은퇴 자금을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축복받은 편이다. 미국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면서 “하지만 절대 부자라서 이렇게 다니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시애틀에서도 썼을 생활비와 부부가 아직 건강하다는 점이 이들의 여정을 지탱하는 가장 큰 조건이다.
2남 2녀를 둔 부부는 자녀에게도 영감을 주고 있다. “우리 애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아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큰아들은 애들 둘을 휴학시키고 1년간 가족과 세계여행을 다녀왔어요. 우리를 보고 쿨하고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죠.”
부부 여행의 기술
부부가 24시간을 함께하면 싸울 일은 없을까. 캠벨 부부는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중 하나”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데비는 “다행히도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서로 각각 맡은 바가 달라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마이클이 아프리카를 썩 내켜 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지난 5년간 가장 큰 이견이었다. 예술가 기질이 강한 데비와 정보 습득을 중요시하는 마이클이 서로 하고 싶은 게 다른 날은 각각 따로 움직인다.
언제까지 노마드로 살 수 있을지는 이들 부부도 가끔 생각하는 문제다. 물론 힘든 날도 있고 스트레스도 적지 않지만, 돌아오는 즐거움이 더욱 크다. 매년 한 해가 마무리될 때쯤 서로에게 묻는다. "계속할까?(Do you wanna keep going? )" 대답은 늘 같았다. “그럼(Yeah)”.
이들은 자신을 보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나이가 많다고 좁은 세상에 갇히지 말아야죠. 꼭 우리처럼 여행일 필요는 없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할 수 없는 이유’ 수십 가지를 만들어 피하지 말고 용기를 끌어모아 도전하세요.”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시니어 노마드(Senior Nomads)= 연장자(시니어)와 유목민(노마드)을 합친 단어로 직장에서 은퇴한 후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자유롭게 여행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