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은 “우리나라는 생명권 존중을 앞세우며 65년이나 된 낙태죄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 생명권을 존중하기 위한 아무런 법적 근거나 조치들을 취하고 있지 않아 오히려 낙태라는 실존적 현실에 내몰린 여성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낙태죄의 옳고 그름 논쟁에 빠져 가장 우선시돼야 할 여성 건강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다.
불법 굴레 탓에 기술 확보 못해
합병증 등 여성 건강 사각지대
“정부, 법 앞세워 책임 방기” 비판론
이유림 성과 재생산포럼 기획위원은 “한국의 낙태죄는 여성의 인권이 아닌 여성을 인구 정책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의식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낙태죄는 1953년부터 명시돼 있었지만 산아제한 시절에는 보건소에서도 소파수술을 해줬을 정도로 낙태가 활성화돼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국가가 강제불임시술을 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하기도 했다. 그러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진 2000년대 이후에야 낙태죄를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한국 정부의 낙태죄에 대한 태도는 국제사회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다. 2011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임신중절을 한 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처벌조항을 삭제하고,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절로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관리를 위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권고문을 보냈다. 정부는 이에 일절 응답하지 않았다. 이에 올해 CEDAW는 다시 “2011년의 권고를 이행하고, 모든 임신중절을 비범죄화하고 임신중절 여성 처벌조항을 삭제할 것”을 촉구했다.
유엔, WHO, 월드뱅크 등 최근 모든 국제기구들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여성의 건강 및 권한 강화’의 측면이 가장 먼저 고려돼야 한다는 점을 명시한다. 이는 1994년 카이로 국제인구개발회의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인구와 개발의 문제가 아닌 여성의 건강과 권리의 문제’로 인식을 전환할 것을 촉구한 이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정부가 현재 국제적 흐름에 눈감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은실 이화여대 교수는 여성정책연구원 낙태죄 폐지 세미나에서 “한국은 가족계획사업을 통해 국가가 여성의 출산력을 감소시켰던 성공적인 경험을 통해 여전히 국가 정책으로 여성 출산력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여성인권에 대한 재정의 등 환경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선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