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로카르노시 광장 메운 설치 미술 ‘아폴리데’
무리지은 홍합 튜브떼가 의미하는 것은
혹시 홍학 튜브는 원주민, 그리고 다른 형태와 색상의 튜브들은 타지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틈을 주지 않고 똘똘 뭉쳐있는 앞쪽 구석의 홍학 튜브 무리는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원주민 사회를, 다른 여러 튜브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홍학 튜브는 이민자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자세히 보니 튜브들은 서로 노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어쩌면 원하던 혹은 원하지 않던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을 표현한 것일지도 몰랐다. 바람이 빠지거나 터진 몇몇 튜브는 무리에서 멀리 떨어진 채 쓸쓸히 버려져 있었다. 타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거나 무시당해 결국 존재가 사라진 이민자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고통
아폴리데, 즉 무국적자라는 의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세계시민 사상부터 에라스무스의 사전 설정된 힘과 관련한 자율성에 대한 의식적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변주된다. ‘국적 없는’ 많은 이민자들(특히 하루에도 수 백명씩 유럽으로 불법 이주하는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난민들)은 상황과 상태에 따라 그들이 속해있던 민족과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을 근본적인 권리를 박탈 당한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들은 종종 복잡한 상황을 간과하거나 단순화시킨다. 미해결 문제의 철학적 반성에 얽히는 것에 사람들은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소외와 파괴 상태를 피하는 ‘무국적’이라는 용어에 법적인 정의를 부여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번의 퍼포먼스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그러나 작가 오피 드 베르나르도는 짧은 시간이나마 로카르노의 그란데 광장을 더 이상 경계와 민족성과 인종 같은 차별이 없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초현실적이고 행복한 유토피아의 섬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발견하는 것은 관람객들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로카르노(스위스)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통신원
사진 Locarno: ‘Apolide’ di Oppy De Bernardo <00A9> ⓒTi-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