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다운사이징(downsizing) 시대다. 선수 숫자를 줄여 새 종목을 만드는 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선수가 줄면 경기장 면적이 줄고, 경기 시간이 줄고, 규칙이 간소화된다. 높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엘리트 스포츠의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다. 일반인의 참여를 늘리고 일상 속으로 더 깊이 침투하기 위한, 종목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현장을 들여다봤다.
올림픽 정식종목 된 3·3 농구
사람 모이는 곳 어디든 경기 가능
고양서 국제대회, 국내리그도 시작
'찜뿌' 베이스볼5 공인한 WBSC
쿠바 등 중남미 청소년 중심 인기
공간·장비 제약 없어 야구 붐 기대
연습이 대회가 된 8인제 축구
선수 무한교체, 패스·슈팅 수 늘어
축구협, 내년부터 전국대회 열기로
쇼핑몰에서 격투기 같은 농구 잔치
대회장은 시끌벅적한 잔치판이었다. 1층은 물론 2층과 3층을 꽉 채운 관중은 연신 흘러나오는 음악과 치어리더의 율동에 열광했고, 선수들의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에 환호했다. 경기 시간은 딱 10분(국내 프로농구는 40분, 미국 프로농구 NBA는 48분). 한 팀이 21점을 먼저 넣으면 경기가 끝난다.
3·3 농구는 기존 5인제 농구 코트의 절반보다 약간 작은 공간에서 벌어진다. 공을 가진 팀은 12초 안에 슛을 쏴야 한다. 격투기처럼 몸싸움이 치열하지만 심판은 좀체 휘슬을 불지 않는다. 지난 18일 끝난 프로농구(KBL) 챔피언결정전에서 심판 판정을 둘러싸고 숱한 불만과 해프닝이 불거진 것과 대조된다.
이번 대회 타이틀후원사인 스포츠몬스터의 홍성욱 대표는 “다른 종목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아가야 하지만 3·3 농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간다. 도시인의 상징 공간인 쇼핑몰에 이어 한강에 바지선을 띄워 경기를 치르는 것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3대3농구연맹은 다음 달 프리미어리그를 출범한다. 6개 팀(한국 5+일본 1)이 각 팀 연고 도시를 돌며 주말에 경기를 벌인다.
3·3 농구는 2020 도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계기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 8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도 3·3 농구가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야구 기대
야구는 공·배트·글러브·프로텍터 등 장비가 많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소프트볼이 있긴 하지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경기하기도 어렵다. 리카르도 프라카리 WBSC 회장은 “베이스볼5는 공간의 제약으로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가 힘들었던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10년 후 10억명의 야구·소프트볼 인구 조성이라는 목표 달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스볼5는 올해 10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청소년 올림픽의 시범 종목으로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베이스볼5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선수 공급원인 쿠바·푸에르토리코 등 중남미 청소년 사이에서 성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발빠른 움직임이 있다. 2018 대한체육회 생활체육 활성화 공모사업에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신청한 ‘5대5 길거리야구’가 선정됐다. 여름방학에 중·고생을 대상으로 실내체육관에서 대회를 열 예정이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황정주 운영1팀장은 “야구가 시간·장소·장비 등 핸디캡을 뛰어넘어 올림픽에서 살아남고, 전 세계에 보급하기 위해 베이스볼5가 제안된 것으로 안다. ‘찜뿌’의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8인제 축구가 11인제 대체할 수도
지난 13일 성덕초와 속초초의 전국초등축구리그 강원권역 경기가 열렸다. TV로 생중계된 이날 경기는 빠르고 흥미로운 전개로 주목 받았다.
8인제 축구는 기존 구장의 3분의2 크기인 68mx47m에서 열리는데 골대 사이즈는 똑같다. 패스 게임을 유도하기 위해 골킥이 공중에 떠서 하프라인을 넘지 못하게 했고, 선수 교체는 아이스하키처럼 무제한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지도자들은 경기 중 어떤 지시도 할 수 없고, 전후반 각각 2분씩 코칭 타임에만 작전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축구 선진국에서는 ‘스몰 사이즈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8인제 축구가 자리잡았다. 축구협회는 지난해 9월 11인제와 8인제 경기를 비교 분석했다. 1인당 볼 터치와 패스, 슈팅, 인터셉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8인제가 11인제보다 월등히 높았다.
2011년 국내에 8인제 축구를 도입한 황보관 전 FC 서울 감독은 “1대1 상황 대처 능력, 페널티지역에서 몸싸움과 드리블 능력 등을 키우는데 8인제가 큰 도움이 된다”며 “지금은 8인제가 11인제의 보조 수단이지만 앞으로는 8인제가 대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종목 창조적 파괴 흐름 읽으면 미래 스포츠 보일 것
김 회장은 “길거리농구 첫 대회 출전 팀이 3400개였고, 선수는 1만4000명에 육박했다. 당시는 농구 인기가 폭발적이었지만 농구용품을 살 형편은 못 됐다. 지금은 3·3 출전 선수들이 첨단 농구화와 멋진 유니폼을 살 수 있다. 한국의 3·3 농구가 글로벌 흐름에 진입했고, 시장이 커지면서 기업들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스포츠산업협회장이기도 한 김 회장은 “스포츠의 다운사이징 추세는 더 뚜렷해질 것”이라며 “과거 스포츠는 권위적인 요소가 많았다. 소수 엘리트가 ‘우리가 할 테니 너희는 보기만 해’라는 식이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에 그 종목의 성쇠가 달려 있다. 이로 인해 인원·공간·시설·룰에 대한 창조적인 파괴가 일어난다”고 분석했다. 이번 고양 3·3 챌린저 대회는 유튜브와 네이버 등을 통해 생중계됐다. 김 회장은 “3·3농구는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스포츠다. 경기 시간이 짧고 공간이 적당해 영상으로 만들기 좋다. 휴대전화로도 동영상을 찍어서 온라인에서 공유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김 회장은 “잘 나가는 글로벌 기업인 팡(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의 머릿글자)의 공통점은 플랫폼 비즈니스다. 미래 스포츠도 어떤 플랫폼에 어떤 콘텐트를 태우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다”고 예측했다. 그는 플랫폼 비즈니스에서 국제농구연맹(FIBA)을 주목해야 한다며 “3·3 선수 등록은 FIBA에 직접 해야 한다. FIBA는 데이터 기반의 국가별 네트워크를 활용해 축구보다 더 많은 등록 선수를 보유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다운사이징을 통한 스포츠 종목간의 주도권 싸움이 이미 시작됐다. 그 흐름을 면밀히 읽으면 미래 스포츠가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