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딸려 있는 섬이라는 말이니 자주적인 땅이 아니라는 뜻이어서 섬은 육지에 종속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내 과민일까? 섬에 사는 이들이 육지에 사는 이들을 ‘육지것’ ‘뭍것’이라는 원망에 찬 단어로 지칭하는 게 섬은 우리 영토에서 은연중 하위존재로 취급한 까닭이며,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이른 지금에도 국토의 봉건적 주종관계를 헌법에서조차 의심 없이 명시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남북간 화해로 한반도에 봄이 피면
남한은 유라시아 대륙에 이어지고
연결된 철도로 유럽 건너온 이들의
최종적 목적지는 4000개 우리 섬들
대륙열차를 타고 그 섬 가고 싶은 게
유럽인 버킷리스트 될 날 머지않아
그러나 남·서해안에 펼쳐있는 우리의 섬들은 그 크기가 참으로 다양하고 섬 사이의 거리들도 제가끔이라 이들이 모였다가 헤어지며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은 백태며 만상이다. 뿐만 아니라 섬 모양도 각각 다르지만 삶의 방식과 물산도 다 달라 모두 고유하며, 더러는 유배와 추방, 음모와 혁명의 역사도 있어 그 서사적 풍경 또한 특별하다. 배를 타고 산수화 같은 그 사이들을 주유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모두들 시인이 되고 로맨티스트가 되며 성찰자가 되는 일이다. 특히 황혼에 물든 물결에 검은 추상으로 겹겹이 펼쳐지는 풍광 속에 들어가면, 우리가 사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절로 내뱉게 된다.
이런 아름다움이 세계에 왜 아직도 소개가 안 되어 있을까? 필시 권세를 잡은 육지것들이 그 아름다움에 대해 무식하거나 혹은 부속도서인 만큼 변방의 영토로 간주하는 까닭이다. 그래서인가 섬들을 가능하면 연륙교로 연결해서 육지로 편입시키고자 부단히도 노력해왔다. 섬이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는 순간 그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섬이란 단어 그대로 해석해서 피안의 세계 아닌가? 물 건너 다른 세상. 그래서 육지의 일상에 지쳐 있을 때,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할 때 우리와 다르게 사는 낯선 곳으로 여행하여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갖는다.
예컨대 제주도. 육지와 다른 풍토와 음식 그리고 서사와 풍경이 지독히 매혹적인 이 섬에 가서 행여나 일기가 나빠 비행기가 뜨지 않으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양해가 가능한 그 천재지변의 기회를 나는 만끽한다. 어쩌면 은연중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그곳에 가는지도 모른다. 그런 서로 다른 세계가 무려 4000개가 모여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기회들을 아예 없애기 위해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놓아 육지와 연결하자는 발상은 섬의 정체성을 사라지게 할 것은 물론 기회도 환상도 소멸시키는 일일 뿐이다.
보석 같은 섬들을 부속 영토로 보는 까닭은 아마도 지도를 보는 방식이 늘 북쪽을 위에 두어 섬들의 위치가 아래쪽이 된 이유일 수도 있다. 지도를 그렇게만 보란 법이 없으니 한번 뒤집어 보시라. 그러면 수 천개의 섬들이 마치 꽃봉오리 만개한 것처럼 반도의 땅 위에 통통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형태도 위치도 다 다른 이 섬들은 모두가 모두에게 평등하며 자주적이다. 그러니 ‘여러 도서와 그 부속 육지’까지는 아니어도 ‘한반도와 여러 도서’가 다원적 민주주의 시대에 합당한 영토 규정 아닌가?
마침 남북 간 화해로 한반도에 봄이 활짝 피게 되면 남한은 이제 섬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에 이어질 것이며, 행여 철도가 연결되면 유럽에서 대륙을 건너온 이들의 최종적 목적지가 4000개 가까운 우리의 섬들이 될 게다.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열차를 타고 그 섬에 가고 싶은 게 그들의 버킷리스트가 될 날이 머지않다.
한마디 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해저터널로 연결하자는 모임이 꽤 오래전부터 부산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이 대륙 진출을 명분으로 한반도를 침략한 게 왜란의 역사인데, 터널을 뚫어주어 우리 땅을 간이역으로 스스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심산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동아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