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환의 외교노트] 6자회담 실패의 교훈
북한 입장은 결국 자신의 우려·관심 사항과 비핵화를 단계적·동시적으로 취해나가자는 것이다. 북·미가 서로 포괄적 공약을 하고, 상호 행동으로 해결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동시 병행적 접근은 북한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다. 북한이 한 달 새 비핵화 의제와 방식을 모두 제시한 것은 기선 잡기의 일환으로 보인다. 의제 선점(先占)은 지난 20여 년간 북한 협상술의 최대 특징이다.
6자회담 때부터 북·미 원칙 충돌
2005년 ‘검증 가능한 비핵화’ 합의
마감 안 둬 북한에 시간만 벌어줘
포괄 합의 단계적 이행 시점 정하면
북한 아닌 국제 사회가 시간 주도권
리비아 핵 포기 이끈 볼턴, 속전속결 주장
현재의 북·미 입장은 2000년대 중반 6자회담 초기를 연상시킨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2003년 5월 이래 북한 핵의 CVID를 공식 목표로 삼았다. 당시의 D는 비핵화(denuclearization)가 아닌 해체(dismantlement)였다. 비핵화가 포괄적인데 반해 해체는 구체적이고 물리적 의미가 강하다. 미국은 그해 8월 1차 6자회담에서 CVID를 4번, 이듬해 2월 2차 회담에서 14번이나 언급했다. CVID 주장의 중심축은 딕 체니 부통령이었다. 그를 존 볼턴 당시 국제안보·군축 담당 국무부 차관과 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떠받쳤다. 군축 전문가인 로버트 조지프 백악관 비확산 국장도 한몫했다. 조지프은 2003년 리비아 핵 포기 비밀 협상 때 미국 수석대표였다.
북한은 1차 회담에서 CVID에 맞서 동시 행동의 일괄 타결을 주장했다. 북핵 사찰과 폐기,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 및 외교관계 수립 등을 동시에 순서대로 밟아나가자고 했다. 김영일 외무성 부상의 발언은 북한식다웠다. “네가 먼저 한 발짝 움직이면 나도 한 발짝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너 한 발짝 나 한 발짝 같이 움직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1차 회담은 공동발표문을 내지 못했다. 미국의 선 핵 폐기와 북한의 동시 행동 간 간극은 컸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의장국 요약에서 “모든 참가국은 원칙적으로 단계적, 동시 또는 병행 실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단계적, 동시 병행’은 김정은이 지난달 시진핑에 밝힌 것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김정은 발언은 향후 비핵화 논의 과정에서 북·중 간 연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침 왕이 중국 외교부장 겸 국무위원은 6자회담의 산증인이다. 북한식 해법의 궁극적 승자는 중국일 수도 있다. 북한이 비핵화하면 동북아에서 중국의 핵무기 독점이 유지된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의 규모가 줄고 성격이 바뀔 수밖에 없다. 서해를 사이에 둔 주한미군과 최첨단 무기체계는 중국에 눈엣가시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수석 부차관보는 “최근 몇 년간 북·중 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이징과 평양은 미국의 ‘위협’에 대해선 전략적 동지(strategic bedmates)”라고 말했다(뉴스위크 기고).
9·19 공동성명 핵시설 불능화 단계서 파탄
최근 북한 비핵화 관련 각국 입장
◆ 2017년 7월 6일 문재인 대통령,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 단계적·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 2018년 3월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남한 특사단에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 없다.”
◆ 2018년 3월 25일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 “북한 비핵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좋다.”
◆ 2018년 3월 26일 김정은, 북·중 정상회담 “한·미가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 2018년 4월 2일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지만 만나는 목적은 바로 CVID가 필요하고 이것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2018년 4월 3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 “포괄적이고 단계적 방식으로 타결한다는 큰 방향 외에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다.”
◆ 2018년 4월 10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협의의 진전은 단계적으로, 대북 안전보장은 철근콘크리트처럼 강고해야 한다."
◆ 2018년 3월 5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남한 특사단에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을 보유할 이유 없다.”
◆ 2018년 3월 25일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 “북한 비핵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좋다.”
◆ 2018년 3월 26일 김정은, 북·중 정상회담 “한·미가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조치를 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 2018년 4월 2일 마크 내퍼 주한 미국 대사대리,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지만 만나는 목적은 바로 CVID가 필요하고 이것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 2018년 4월 3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 “포괄적이고 단계적 방식으로 타결한다는 큰 방향 외에 아무것도 정리된 게 없다.”
◆ 2018년 4월 10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협의의 진전은 단계적으로, 대북 안전보장은 철근콘크리트처럼 강고해야 한다."
2~3년 뒤 협상 되돌아보는 관점서 접근을
다른 하나는 북·미 정상회담 후 후속 협의가 다자 차원으로 진행될 경우 각국 대표의 급(級)이다. 정상의 전권을 위임받은 인사로 채워져야 한다. 각국 대표가 외무장관이든 국가안보보좌관이든 그래야 회담에 속도가 난다. 외무 차관보급이 수석대표인 6자회담은 본국 훈령을 받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다. 미국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내 강온파 간 대립으로 훈령이 죽도 밥도 아닌 경우가 적잖았다.
북한의 돌발적 요구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과거 20여 년간 북핵 협상에 미뤄보면 북한이 경수로로 상징되는 평화의 핵까지 포기할 가능성은 작다. 북한이 2010년 착공한 영변의 실험용 경수로 가동에 최근 박차를 가하는 것은 이와 맞물린 듯하다. 경수로는 김일성의 유훈이기도 하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의 요체는 경수로 제공과 핵시설 동결의 맞교환이었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권리 보유’와 ‘경수로 제공 문제 논의’가 들어간 것도 북한의 집착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공위성 발사를 요구할 가능성이다. 김정일은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때 미국이 인공위성 발사를 대신해주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중지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인공위성은 김정일의 숙원이다.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중단이나 폐기 조건으로 위성 카드를 꺼내 들지 모른다.
한국은 북한 비핵화 해법의 당사자다. 동시에 중매역이자 촉진자(facilitator)이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는 역할이다. 6자회담 과정에서도 그랬다. 요체는 과정이 아닌 결과물이다. 단기적 외교 성과보다는 2~3년 뒤 현재의 협상을 되돌아보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자세가 긴요하다. 임기가 있는 정권이 종신 정권을 상대하는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오영환 군사안보연구소 부소장·논설위원 hwas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