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김봉석의 B급 서재
포츠담 광장 주변에는 스파이 뮤지엄이 있다. 냉전이 한창일 때, 세계 각국의 스파이들이 모두 몰려들었다는 베를린이라면 능히 있어야 할 스팟이다. 하지만 작년도, 올해도 입장을 하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본 뮤지엄 샵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 체크포인트 찰리 주변에 즐비한 기념품 샵들보다 나은 게 없었다. 뮤지엄 샵이라면 그들만의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독침이라든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서독과 동독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벽을 부수고 넘으며 이전에는 절대로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풍경이 펼쳐졌다. 소련은 사라졌고, 냉전은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세상은 변했다. 스파이의 세계도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적국의 군사정보를 빼내는 것보다는 기업의 첨단 정보를 캐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고, 끝없이 분화하고 변질되는 소규모 테러집단을 감시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 것으로 보였다. 냉전의 시대를 풍미했던 톰 클랜시의 소설 ‘잭 라이언’ 시리즈는 CIA 분석관으로 시작하여 대통령에까지 이르는 스파이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며, 영화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에는 개인의 행동보다 수많은 사실의 분석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그리고 첩보조직 내부의 음모를 그린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물질적 환경은 좋아졌지만 정서적인 빈곤감은 더욱 심해졌다. 세상은 더욱 비열하고,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없는 혼돈상태가 되었다.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생각과 행동의 본질은 같고, 양상만 변했다.
스파이의 세계는 극단적인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극단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한다. 예술도, 정치도 그렇다. 한 개인의 삶이 권력의 이익을 위해 무참하게 짓밟히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온갖 야비하고 치졸한 공작이 태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세계는 냉전 시절만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야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전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지 ‘브뤼트’, 만화 리뷰웹진 ‘에이코믹스’ 편집장. 『전방위 글쓰기』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내 안의 음란마귀』 『탐정사전』 『웹소설 작가를 위한 장-미스터리』 등의 책을 썼다. 영화, 만화 등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활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