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과 2008년 경험했던 한국 경제의 시스템 위험은 자본의 급격한 해외유출 때문에 발생했다. 외환시장과 외화자금시장이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란 뜻이다. 이런 전통적 시스템 위험 차원에서 보면 현재 한국 경제는 지극히 안정적이다. 경상수지 흑자기조가 견조하고, CDS(credit default swap) 프리미엄, 외평채 프리미엄같은 지표가 거의 최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외환보유액과 함께 통화스와프 대상국도 늘었다. 예대비율, 단기부채비율 그 어떤 지표로 봐도 시스템 위험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험요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미국경제 과열은 금리 인상 유발
한국의 시장금리 인상으로 파급
연기금이 보유한 주식·부동산 등
위험자산 가치 급락할 가능성 커
책임 공방·분쟁 감내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글로벌 자본이동이 발생하면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시장금리는 인상된다. 과거에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한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급등해 국채 가격이 올라 금리가 떨어진 경우가 있었다. 통화 당국은 금리를 올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미국이야 자신의 경제 여건 때문에 경기가 과열되어 이를 통제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금리가 오르지만 한국은 경제 여건에 맞지 않게 금리가 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한은의 통화정책과는 무관하게 긴축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100%에 이르는 가계부채가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에 미치는 위험은 그래도 보이는 위험이다. 더 안 보이는 것은 저금리 시대에 위험자산 비중을 확대한 연기금들이다. 서브프라임 위기 등 과거 외국 사례를 보면 금리의 급격한 인상은 연기금이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부동산 등 위험자산의 가치를 급락시킨다.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때는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연기금들의 가치하락이 미미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한국의 연기금들이 주로 안전자산에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안전자산이 80%, 위험자산이 20%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안전자산이 40%, 위험자산이 60% 정도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국내 연기금들도 과거 저금리 시기 동안 국내외 주식·부동산을 비롯한 대체자산 등 위험자산 비중을 크게 확대해 놓았기 때문에, 그리고 헤지는 거의 안 했기 때문에, 금리 인상 시 자산가치 하락에 직면할 가능성 높다. 금리 인상으로 인한 위험자산의 가치 급락은, 선진국 연기금과 달리, 한국 연기금은 처음 맞이하는 현상이다. 처음 맞는 사건엔 허둥대기 쉽다. 물론 연기금은 장기로 자금을 운용하기 때문에 단기적 상황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몇 년이 지나면 회복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 차원에선 맞는 말이다.
현실은 다르다. 10 년 전 서브프라임 위기 때를 뒤돌아보면, 미국과 유럽 연기금들의 자산가치가 급락했을 때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었다. 왜 이런 고위험 자산에 투자했느냐, 왜 이렇게 많이 투자했느냐, 위험관리를 위한 적절한 절차를 거쳤는가, 왜 위험이 빤히 예상되는데 헤지 안 했느냐 등 책임소재 공방과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경제 차원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공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몇 일 전 미국 유수의 투자은행이 금리 인상 시 연기금 자산가치의 하락 가능성 이슈를 제기하는 것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과연 금리가 급격히 올라 위험자산의 가치가 급락하면 한국 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참아 줄 수 있을까. 고금리가 가져올 또 다른 위험요인이다.
김형태 서울대 경영대학 객원교수·전 자본시장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