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무한도전’
MBC ‘무한도전’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그저 하나의 프로그램이 종영한 것에 ‘시대’ 운운하는 것이 지나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프로그램이 13년간, 그것도 매회 자기 혁신에 가까운 도전들을 계속해왔다는 건 당대의 대중들이 가진 열망과 정서들이 거기 공기처럼 담겨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 몇 가지 변화들을 열거하면, 성장드라마 시대의 종언, 시즌제, 리얼리티 시대와 중심 없는 수평 리더십의 시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댄스스포츠·봅슬레이·컬링 등
매회 자기혁신 도전에 박수갈채
시대 가치 성공 → 행복으로 변화
‘성장드라마’ 한 시대가 저물어
‘시즌제’의 요구는 이런 가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쉬지 않고 13년을 ‘무한히’ 달려오는 도전은 성장드라마 시대의 종언과 함께 이젠 휴지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미래의 성공을 위한 현재의 희생이 성장드라마 시대의 방식이었다면 당장 현재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이른바 ‘욜로적’ 생각들이 꿈틀대는 건 멈추지 않으면 자칫 소진되어버릴 수 있는 ‘노오력’의 시대의 반작용이다. ‘시즌제’란 그래서 쉬어야 더 좋은 것들이 나온다는 가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요소다.
또한 캐릭터쇼에서 만들어진 수직적인 인물 구성 역시 지금의 시대와는 맞지 않는 방식이다. 즉 1인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유재석과 그 밑에서 영원한 2인자 역할로 남아있는 박명수, 그리고 유재석을 ‘유느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하하 같은 수직적 구조는 캐릭터쇼를 위해 구축된 것이지만, 그건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리더’와 ‘센터’에게로만 집중되는 대중의 시선이 이제는 분산되고 다양화된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대중들은 드라마에서 주연에만 거의 집중했지만, 지금은 그 주변 인물들에도 시선을 준다. 적은 등장에도 매력적인 이른바 ‘미친 존재감’이라는 인물군이 생겨나는 건 이러한 다양성 사회로의 변화를 말해준다.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는 과정을 촉발시킨 건 인물들을 각각 조명해낼 수 있는 카메라의 일상화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카메라가 몇몇 중심적인 인물들과 그 리더십에 집중했다면, 이제 누구나 손안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시대에 각각의 카메라들은 각각의 인물들을 비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한도전’의 오프닝에서 흔히 발견되는 한 줄로 죽 선 인물들이 서로 센터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들이 이제는 옛 풍경이 되어버렸다. 이제 무수히 설치된 관찰카메라들은 그런 중심 자체가 없는 세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무한도전’의 종영을 아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 종영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그 13년 사이, 성장드라마는 종언을 고했고, 무한 ‘노오력’이 아닌 중단 있는 삶이 요구되기 시작했으며, 투명사회가 도래했고 수평적인 관계를 중요한 가치로 보게 됐다. 그러니 휴지기를 거쳐 돌아온다는 김태호 PD의 선택은 어쩌면 더 긴 흐름의 ‘무한도전’인 지도 모른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롭게 열리는 시대에 맞춰진 또 다른 무한도전.
각종 방송 활동, 강연 등을 통해 대중문화가 가진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 남자들의 숨은 마흔 찾기』 『웃기는 레볼루션』(공저)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가 있다. 더키앙(thekian.net)이라는 사이트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