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동아시아 필묵(筆墨)의 힘 East Asia Stroke’(4월 1일까지)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서예가를 나라별로 25명씩 선정해 총 75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한중일 대표 서예가들이 한자리에서 ‘우리 시대 글씨의 횡단면’을 보여주는 전시는 20세기 들어 사실상 처음”이라며 “한중일을 필획(筆劃)으로 엮인 하나의 큰 ‘필묵 공동체’로 보았다”고 기획의도를 말한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동아시아 필묵의 힘' 가보니
전시장 초입에서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중국국가화원 부원장으로 있는 저명 서법가 쩡라이더(曾來德)가 두보의 시를 적은 ‘증화경(贈花卿)’(2017)이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는 선입견을 가차없이 깨뜨린다. 흰 종이 위에 흰 글씨가 써있기 때문이다. 갈필로 붓을 끌면서 써서 필획 가운데 군데군데 먹이 묻지 않은 빈 공간이 생기도록 하는 비백(飛白)이라는 기법이다. 후한의 채옹이 고안한 방법으로, 붓의 기운이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예가 김종원의 ‘차 두봉 1,2(육유, 당완)’(2017)도 흥미롭다. 이게 글씨인가 싶을 정도로 난분분한 낙서, 혹은 울부짖는 격정의 토로처럼 보이는 두 작품은 중국 남송시대 유명 시인 육유와 부인 당완이 주고받은 시를 쓴 작품이다.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헤어져야만 했던 사연이 절절한데, 특히 당완은 이 시를 쓰고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당완의 시를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세상은 야박하고 인정도 사나워 황혼에 뿌린 비 꽃은 쉬 지고 / 새벽 바람에 밤새운 눈물 말려라 이 마음 전하려 홀로 난간에 기대어보나 / 어려워 어려워 하 어려워 우리 헤어져 오래이니 / 병든 마음 그네처럼 흔들려 한밤 호각소리 서러워 / 이 마음 남이 알까 눈물 삼킨 웃음 속였어, 속였어, 내 마음까지 속였어”
남편과 헤어져 혼자 살아야했던 아낙의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까. 그러고보니 또박또박 써서는 이 시에 담긴 감정 전달이 제대로 안 될 법도 싶다. 작가는 “시에서 감발한 나의 정서를 필획 언어로 구성했다”고 말한다.
대형화·시각화…현대 미술 방불케
“21세기 미술 등 시각예술의 향방을 동아시아의 서(書)가 제시하고 있다”(서예가 권창륜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이사장) “전통 서예는 필묵 표현과 글의 내용을 동시에 중시하지만, 현대의 서예는 조형과 필묵의 시각 효과를 즐기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중 작품의 대형화는 빠질 수 없는 추세”(송명신 중국 하문대 서예연구생 지도교수)라는 말 그대로다.
길이가 4m에 달하는 작품 4점을 묶은 서예가 전정우의 ‘파문’(2018)은 획의 묘미가 극대화된 작품.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글자의 형상 이전의 필획 자체의 맛으로 21세기 서의 향방을 타진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일본 최고 작가로 꼽히는 다카키 세이우(高木聖雨)의 ‘유예(遊藝)’(2017)는 가로 3m, 세로 4m에 달하는 커다란 작품인데, ‘예술에서 놀다’라는 의미를 노는 아이의 모습으로 상형문자처럼 표현했다.
그런가하면 가로 2m 80cm, 세로 4m 80cm에 달하는 하석 박원규의 ‘평창’(2017)은 강원도 평창에 온 눈으로 먹을 갈아 현지에서 그린 대작이다. “온 세상은 태평(太平)을 기원하고 / 올림픽은 영창(寧昌)을 연호하네”라는 시도 지어 ‘평창’이라는 지명 의미를 통해 올림픽 성공을 기원했다. 이 큐레이터는 “설원을 종횡으로 활강하는 곡직의 필획이 시종일관 화면에 가득하다. ‘평화창성’을 기원하는 신전을 지었는데, 그 기둥은 3000년전 고대 신성문자의 직획을 초현대적으로 구축했다”고 해석했다.
중국 작가들도 평창올림픽 성공을 기원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예신(葉欣)은 진시황 시절의 전서와 예서, 행초서와 전각까지 고루 선보인 ‘평창올림픽’(2017)이라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소개했다. “자청색 종이에 금가루를 이용해 적었고 노란 종이 위 두 개의 붉은 인장은 고대 황궁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중국 작가 섭외 업무를 맡기도 했던 예신은 “저명 작가 중 서체별·나이별·지역별로 안배해 작품을 받아오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전각 분야에서 중국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한톈헝(韓天衡) 중국전각예술원 명예원장, 잡지 ‘중국서법’의 대표이자 편집장으로 서법계를 이끌고 있는 류정청(劉正成), 한국의 백남준과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름을 한자로 쓴 고문서학의 대가 류옌후(劉彥湖) 중앙미술학원 교수, 전국중청년서법전각전에서 현대서예로 처음으로 1등상을 받은 샤오옌(邵巖) 중국국가서원 연구원의 작품을 잘 살펴보라는 게 그의 귀띔이다.
“상업화된 바다에서 서예는 ‘노아의 방주’”
최근 중국에서는 서예 붐이 일고 있다. 송명신 중국 하문대 교수는 “중국에서 서예는 중국 문화의 핵심 중 핵심으로 평가되고 있고, 교육부는 서예를 초중고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고 전했다. 예신 작가도 “초등학교에서 서예공부를 안 하면 중학교 진급이 어려울 정도”라며 “어릴 때부터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붓을 잡은 적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에서는 왜 서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일까. 예 작가는 “글씨가 곧 사람이다. 글씨로 성격도 바꿀 수 있다. 좋은 글만 보고 쓰니 심성이 좋아지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쩡 부원장의 말 역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늘 정신이 팔려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고, 먹고도 맛을 모르면서, 쾌락과 행복은 다 예전만 못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바로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너무 조급하며, 너무 많은 욕망 때문에 순수하고 고요한 마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법을 중시하기만 한다면, 혹은 자기 학습과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이 서법을 내팽개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문명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법의 창작활동은 일반적인 연습에 그치더라도 어떤 교육을, 그리고 인문적 의미에서 우아한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질화되고 상업화된 바다에서 ‘노아의 방주’를 확보하는 것이다. 대가들의 작품을 공들여 연구하다 보면 어느새 기교가 발전하고 결국 환골탈태해 도를 얻게 된다. 기예의 차원을 벗어나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자유로운 경지로 도약하는 것이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