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20세기 잔혹한 지도력 간 격돌
볼고그라드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남쪽 910㎞쯤 아래다. 비행기로 1시간40분. 공항은 아담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세르게이 살렌코(59세)가 나를 맞았다. 그는 도시역사보존회 간부다. 살렌코는 “영웅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이 흐루쇼프 집권 시절(1961년) 볼고그라드(볼가강 도시)로 바뀌었다. 그것은 스탈린 공포통치에 대한 역사의 단죄였다”고 했다.
피의 서사시, 양군 사상자 200만
소련군 역포위 작전 성공으로
독일군 항복, 2차대전의 전환점
스탈린, 실용과 인내심 단련
이념적인 수치심이 없었다
히틀러는 자기 환상의 포로
붉은 군대 잠재력 경시했다
올해 75주년 승전기념 현장서
푸틴, ‘강한 러시아’ 다짐
1941년 6월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폴란드침공(39년 9월)→프랑스 파리함락→영국공략 실패 이후의 움직임이다. 히틀러는 야수적 세계관을 표출했다. “열등 인종과 공산주의 볼셰비즘을 없애는 절멸(絶滅) 전쟁이다.” 소련 슬라브족과 유대인 말살→우크라이나 곡창지대점령→독일 아리안(게르만족)의 생활공간 확보다. “히틀러는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을 추구했다.”(폴 존슨 『모던 타임스』) 전쟁의 성격이 달라졌다. 파멸적 참화가 예고됐다.
1942년 6월 독일의 목표는 한쪽에 집중됐다. 소련 남부 캅카스(코카서스)와 볼가강 지역. 자원(카스피해 유전)과 물류장악이다. ‘블라우(Blau·청색)작전’이다. 스탈린그라드는 공업과 교통 요충지. ‘스탈린의 도시’ 이름은 히틀러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사령관의 6군은 8월 도시 부근으로 진격했다. 8월 23일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가 날았다. 1200대의 독일 비행기가 사흘간 폭탄을 퍼부었다. 도시 전체가 파괴됐다. 불덩어리로 변했다.
성공은 역설이다. 건물 잔해가 소련군에 유리한 엄폐물이다. 주력은 62군, 사령관은 바실리 추이코프. 그는 “적의 장점을 최대한 약화시키자”고 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위기탈출을 보장한다. 코미사르(당 정치위원) 흐루쇼프는 추이코프를 뒷받침했다. 독일군은 근접전을 꺼렸다. 추이코프는 육탄전, 저격수 전투에 주력했다. 소련군은 벽돌 더미를 오가며 기습했다. 독일군 전술은 전차와 보병의 협동. 그 장점이 헝클어졌다. 박물관 건너편 ‘파블로프의 집’은 그런 전투의 상징이다. 거기서 하사 파블로프와 병사 25명은 58일간 독일군을 막았다.
우리는 도심 북쪽 ‘마마예프 쿠르간(Мамаев курган)’으로 갔다. 그 언덕(해발 102m)까지 계단은 200개(200일 전투 뜻함). 엄청난 석상이 나온다. 이름은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 고대 그리스 여신상 형태다. 1967년 완공했다. 높이가 85m(칼33m+어머니상52m). 관광객들을 압도한다.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은 46m. 살렌코의 설명은 인상적이다. “칼을 높이 든 어머니가 조국수호에 나선 아들·딸들을 독려하는 모습이다. 붉은 군대의 투혼은 러시아인의 자기희생과 자발적인 복종심, 파시스트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이 뭉쳐졌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피의 격전지였다. 여덟 번 빼앗기고 되찾았다.
마마예프 공원 중간은 ‘결사 항전’ 구역. 근육질 병사의 조각상(15x12m)은 강렬하다. 불퇴전의 결연한 표정이다. 한 손에 수류탄, 다른 손에 따발총(PPsh41기관단총)을 쥐고 있다. 옅은 미소는 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담고 있다. 이어서 ‘폐허의 벽.’ 벽에서 따발총과 ‘스탈린 오르간’(다연장 로켓포 카추샤)소리, 군가가 얽혀서 퍼진다. 벽에 새긴 병사의 다짐이 있다.
소련군의 저항력은 경이적이었다. 여기엔 엔카베데(내무인민위)의 감시·억압도 작용했다. “포로가 되면 반역(traitor)으로 자동 분류됐다.” (로버트 서비스 『스탈린』) 스탈린의 아들 대위 야코프는 독일군 포로가 됐다. 그도 반역자가 됐다.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은 악마적 이념이다. 그 공간엔 제네바 협정도 소용없다. 서로가 포로들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모스크바 크렘린의 지휘본부 스타프카(Ставка)의 주요 멤버는 게오르기 주코프(최고사령관 대리)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총참모장). 국가 지도자 스탈린은 실용성을 단련했다. “히틀러와 비교할 때 스탈린의 장점은 이념적 수치심이 없다는 것이다(lack of ideological shame).” (안토니 비버 『스탈린그라드』)
독일 총통 히틀러는 자기 환상의 포로다. 그는 자신을 군사천재로 설정했다. 전투의 세부사항까지 간섭했다. 히틀러는 소련의 잠재력과 복원력을 평가절하했다. 10월 중순 독일군은 도시의 90%를 점령했다. 소련군 상황은 악전고투다. 스타프카에선 역공 전략을 짰다. 단순 방어책이 아니다. 독일군을 역(逆)포위하는 것이다. 공세적 상상력은 대담한 역전승을 생산한다.
독일 6군은 앞뒤에서 갇혔다. 사령관 파울루스는 우유부단했다. 그는 돌파·철수를 요청했다. 히틀러는 도시의 상징성에 집착했다. 사수 명령을 내렸다. 1943년 1월 30일 그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묵시적 자살 지시다. 독일군 원수가 항복한 전례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파울루스는 투항했다(2월 2일 전투 종료). 히틀러의 치명적인 역전패다. 참화의 기록은 끔찍했다. 전체 사상자(죽음+부상) 200만 명 (소련군 113만, 독일과 추축국 85만). 이 중 소련군 전사자는 48만, 민간인 4만 명이 숨졌다. 독일군 20만 명이 죽었다.
전시실 문구는 압도적이다. “스탈린그라드 승리는 2차대전 흐름을 바꾼 거대한 전환점이다.” 붉은 천의 테이블 위에 항복 문서가 놓여있다. 하켄크로이츠(갈고리십자가)·독수리 문양·철모·기관총이 보인다. 패망한 나치의 초라한 몰골이다. 소련군의 초상화는 공적·계급순이다. 주코프 원수가 단연 앞선다. 스탈린 동상은 러시아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곳 박물관은 예외다. 살렌코는 “러시아인들은 이중적이다. 잔혹한 스탈린 시대를 경멸하면서 그 시대의 강한 조국상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푸틴의 장기집권은 그런 기대와 열망의 집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