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전략] ‘자유’를 둘러싼 이중성
서울신문 구독률은 연재소설 논쟁이 치열한 무렵에 치솟았고 1954년 8월 연재가 끝난 직후에 현격히 떨어졌다. 연재 종료 무렵에 발간된 단행본 『자유부인』은 한국 최초로 10만 부 판매를 기록했다. 영화 ‘자유부인’ 역시 1956년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기록한 이래 1990년 속편까지 여섯 차례 제작되어 상영됐다. 화제가 됨으로써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아울러 판매도 늘었다.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정비석 소설에 황산덕의 비판
지식인들 가세하며 논란 커져
핵심은 본질에 대한 해석 차이
‘자유’놓고 한국사회 갈등 여전
진영·사람에 따라 다른 목소리
정치적 왜곡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유주의가 최선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코즈 정리만 해도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성립한다. 노벨경제상 수상자 오모르토 센은 1970년 논문에서 ‘자유주의 역설’을 예시했다. 센은 D.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소재로 상황을 설정했는데, 여기서는 대신 ‘자유부인’을 소재로 설명해보자.
1인의 금욕주의자와 1인의 쾌락주의자에게 소설책 『자유부인』을 읽게 할 것인지 아니면 금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상적 상황이다. 먼저, 금욕주의자는 『자유부인』이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되고, 만일 반드시 누군가가 읽어야 한다면 쾌락주의자보다 도덕 무장이 잘 된 자신이 읽는 게 더 낫다고 믿는다. 반면, 쾌락주의자는 『자유부인』이 삶의 멋을 선사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읽는 게 좋고, 만일 한 사람밖에 읽을 수밖에 없다면 삶의 멋을 알지 못하는 금욕주의자가 읽는 게 더 좋다고 믿는다. 즉 두 사람의 선호도가 다음과 같다고 하자.
금욕주의자: 아무 > 금만 > 쾌만 > 모두 /쾌락주의자: 모두 > 금만 > 쾌만 > 아무 (아무=아무도 읽지 않는 것, 금만=금욕주의자만 읽는 것, 쾌만=쾌락주의자만 읽는 것, 모두=모두 읽는 것)
여기서 금욕주의자는 쾌락주의자가 읽든 안 읽든 자신은 읽지 않는 게 낫고, 쾌락주의자는 금욕주의자가 읽든 안 읽든 자신은 읽는 게 좋기 때문에 게임 결과는 쾌락주의자만 읽는 ‘쾌만’이다. 쌍방 모두 ‘쾌만’보다 금욕주의자만 읽는 ‘금만’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쾌만’이라는 결과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 둘 다 읽는 결과인 ‘모두’는 선택에서 배제하고, 또 각자 읽고 안 읽고는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당사자의 뜻대로 정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금욕주의자가 읽는 것과 아무도 안 읽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금욕주의자의 뜻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아무’보다는 ‘금만’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쾌락주의자가 읽느냐(쾌만)와 안 읽느냐(아무)의 선택에서도 쾌락주의자의 뜻에 따라 쾌만 ≫ 아무 로 정하는 것이 자유주의 원칙이다. 쾌만 ≫ 아무 그리고 아무 ≫ 금만, 이 둘을 다 반영한 자유주의 원칙의 결과는 쾌락주의자가 읽는 것(쾌만)인데, 이 또한 사회적으로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쾌만’보다는 ‘금만’이 모두에게 더 나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센은 이를 ‘자유주의 역설’로 불렀다.
자유주의의 한계는 과장된 면도 있다. 앞서 소설책 『자유부인』 한 권만을 두고 누가 읽을 것인가를 정하는 상황에서 쾌락주의자는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읽지 않으면 자기라도 읽겠다는 행동을 보일 것이다. 따라서 금욕주의자는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결과인 아무도 읽지 않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금욕주의자는 자신에게 차선인 결과를 얻기 위해 자신이 읽는 것(금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역설은 흔한 현상이 아니다.
사실 자유라는 말은 참으로 자유롭게 해석된다. 자유라는 의미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같은 문화적 뿌리를 가진 유럽과 미국이 서로 다르고, 한국에서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197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한 세력의 가치는 자유였다. 정치적 권력자는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또 경제적 기득권자는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미투’ 운동은 자유권의 확립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자유와 관련되어 우려되는 바는 ‘자유’라는 용어의 폐기 시도다. 헌법과 역사교과서에 ‘자유’라는 말을 넣니 빼니 하는 진영 간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같은 시공간임에도 진영마다 또 사람마다 자유를 다르게 주장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자유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자유는 정치적 왜곡 없이 본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일방의 자유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자유를 제한 받아서 오히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야 비로소 그 제한을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연재 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