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리포트] 그린란드서 명암 갈린 두 종족
이렇게 된 건 단순히 추워서가 아니었다. 바이킹이 그린란드에 상륙한 2~3년 후 북극 종족인 이누이트도 정착했다. 소빙하기에 바이킹은 사라졌지만, 이누이트는 오히려 번성했다. 소빙하기 동안 그린란드에서 생존이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리학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에서 “바이킹은 그린란드에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생존 방식으로 바꾸지 않았다. 이전에 역경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가치를 변화된 환경에서도 사람들이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왜 이전에 성공적인 가치가 새 환경에서는 파국에 이르게 했을까?
1000년 전 온난기에 이주한 바이킹
화산 폭발로 지구 기후 냉각 시작
건초 생산량 떨어져도 사냥 외면
유럽식 의복 고수, 추위에도 취약
이누이트족은 바다표범 사냥해서
기름으로 얼음집 이글루 난방하고
가죽 옷 만들어 입으며 자급자족
성층권으로 방출된 황산염이 햇빛 차단
추위가 심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노르웨이의 관례적인 방식을 고수한 바이킹은 그린란드에서 양·염소·소를 계속 키웠다. 지나친 방목으로 토양 침식이 가속했다. 집을 짓고 난방을 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잔디를 벗겨 냈다. 결국, 나무가 거의 없어 새로운 배를 건조하거나 오래된 배를 수리할 수 없었다.
소빙하기 그린란드는 식물 성장의 기후학적 한계선상에 있었기에 손상된 환경을 자연적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겨우내 가축을 먹일 건초의 생산량이 떨어져 가축이 제공할 수 있는 식량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식생활이 유럽식의 쇠고기와 유제품 중심에서 바다표범으로 바뀌었다. 정착 초기에 해양 동물은 식단의 30~40%를 차지했다. 그 비율은 꾸준히 상승해 소멸 무렵에는 식단의 80%가 바다에서 공급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바이킹이 소빙하기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겨울철에는 반달바다표범만이 그린란드에 머물렀지만 다른 바다표범보다 사냥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식량이 부족한 겨울철에도 이누이트는 반달바다표범을 사냥해 식량 공급에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목축을 터전으로 삼던 바이킹은 얼음 바로 아래 반달바다표범이 있었지만, 소빙하기 겨우내 굶주렸다.
굶주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추위에도 떨어야 했다. 혹독해지는 추위에 이누이트처럼 바다표범 가죽으로 만든 파카와 털바지가 더 적합한데도 바이킹은 유럽식 의복을 계속 입었다. 심지어 여자들은 양털로 만든 짧은 가운을 입었다.
바이킹, 노르웨이와 무역에 크게 의존
바이킹은 무역을 통해서 혹독한 환경 조건을 개선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린란드 지배계급의 근시안적인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장기적인 이익을 막았다. 권위를 세우는 데 필요한 사치품 수입을 줄이고 철과 목재를 더 많이 수입할 수 있었다면, 목초지를 개간하고 사냥 도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린란드의 지배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으로 아시아와 동아프리카의 코끼리 상아가 다시 유럽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후 포르투갈과 다른 국가들이 아프리카 무역로를 개척하면서 코끼리 상아를 유럽 시장으로 가져왔다. 1349~1350년에는 노르웨이 본토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인구의 절반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바다코끼리 상아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1400년대에 들면서는 상아 조각이 유럽에서 유행하지도 않았다.
1420년께 소빙하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그린란드·아이슬란드·노르웨이를 잇는 바닷길에 여름에도 빙하가 떠다니는 경우가 잦아졌다. 매력적인 물건이 없는 곳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노르웨이가 그린란드까지 힘들게 배를 보낼 이유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그린란드 바이킹은 완전히 고립됐다. 이처럼 바이킹은 세계화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중세온난기에 그린란드 바이킹은 서로 힘을 합해 가혹한 환경에서도 역경을 극복했다. 성당을 지었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십일조를 보냈으며 유럽 본토와 적극적으로 거래했다. 그린란드 정착지는 종교적·법적·경제적으로 노르웨이와 완전히 통합된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 후 소빙하기의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바이킹은 이누이트에게 생존법을 배우지 않았다. 유럽인의 정체성을 고수하느라 생존을 위한 변화를 거부한 것이었다.
이누이트는 바이킹과 사뭇 다르게 대처했다. 이누이트는 북극권에서 수천 년을 지내면서 가혹한 기후를 이겨 내온 삶의 방식을 계승했다. 그린란드에는 집을 짓고 난방을 하며 조명으로 사용할 나무가 별로 없었지만, 이누이트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눈으로 만든 집인 이글루를 지었고, 고래와 바다표범의 기름을 태워 집을 난방하고 조명을 밝혔다. 배를 만들 때도 배의 골조에 바다표범 가죽을 씌워서 나무가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는 우미악을 만들어 먼 바다로 나가 고래 사냥을 해 식량과 기름을 확보했다.
소빙하기 그린란드는 바이킹 ‘비극’과 이누이트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가혹한 환경에서 인간 사회가 소멸할 수 있지만, 그 붕괴가 필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린란드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말해 준다.
우리는 이념, 문화, 정치와 경제가 어우러진 정체성을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정체성을 발판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세계화 구조에 편입되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식량 자급률은 약 27%, 에너지 자급률은 약 3%밖에 안 된다. 주요 상대국이 무역보복을 들고나오거나 수출이 안 되면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에 놓여 있다.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에너지 자급률 3% 한국, 생존 위기 올 수도
소빙하기 그린란드에서 바이킹이 소멸할 때 100년 동안 북반구에서는 기온이 겨우 약 0.2도 하강했다. 인류가 화석연료를 사용해 지난 100년 동안 전 지구 기온이 무려 0.85도 상승했다. 지금과 미래의 기후는 과거의 연속 선상에 있지 않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바이킹 이야기는 지금까지 기후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대부분 가치와 체계가 무력해질 것을 의미한다. 소빙하기보다 격렬하게 변화되는 기후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와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다.
스콧은 남극서 죽고 아문센은 생환한 이유
이누이트에게 생존법을 배우지 않아 그린란드에서 바이킹이 소멸한 지 500년이 지나 바이킹의 후예인 아문센은 이누이트에게서 극지 생존법을 배웠다. 아문센은 추위에 강한 개가 썰매를 끌게 하고 털가죽 방한복을 입었다. 심지어 펭귄까지 잡아먹었고 탐험 과정에서 죽은 개는 개의 먹이로 주었다.
반면, 당시 강대국인 영국의 지원을 받은 스콧 탐험대는 조랑말과 최첨단 장비인 설상차를 가지고 갔지만, 남극 추위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영국에서 생산된 최고급 모직 방한복을 입었다. 그러나 땀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모직 의류에 얼어붙어 보온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결국, 문명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스콧 탐험대를 전원 사망으로 몰고 갔다. 문명을 탄생시킨 기후환경이 아닌 다른 기후환경에서 기존 삶의 방식이 생존을 보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세대 대기과학 박사. 국립기상연구소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역임. 미국 지구시스템과학원 지구대기감시연구소 탄소순환연구실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