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밀어낸 못난이 신발
대표적인 게 고무 스포츠 샌들 크록스다. 어글리 시크라는 말이 있기 전부터 이미 못난이 원조였던 이 신발이 제대로 물을 만났다. 런던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케인은 지난해 자갈 장식에 이어 올해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붙인 크록스를 선보였다. 발렌시아가 역시 10㎝가 족히 넘어 보이는 통굽을 달아 런웨이에 등장시켰다. 케인은 언론에서 “왜 크록스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같은 답을 하곤 했다. “못생겨서 좋다. 여성스럽지 않고, 멋진 척할 필요도 없다는 게 맘에 든다.”
뭉툭한 신발, 낙서 갈겨쓴 티셔츠 …
스니커즈 역시 못난이 대열에 들어섰다. 하얀 운동화에 일부러 낙서를 한 듯 한다거나(마르지엘라), 때 탄 것처럼 빛바랜 느낌을 연출하기도 한다(구찌). 발렌시아가의 트리플에스 모델을 필두로 셀린느·에트로·랑방·디스퀘어 등은 잇따라 두툼한 밑창으로 투박해 보이는 운동화를 ‘잇슈즈(it shoes)’로 선보이고 있다.
아웃도어를 일상복처럼 … ‘고프코어’ 등장
고프는 그래놀라(Granolas)·귀리(Oats)·건포도(Raisins)·땅콩(Peanuts)의 머리글자를 딴 약자. 트레킹이나 캠핑을 갈 때 먹는 견과류 간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웃도어 의류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플리스 집업 점퍼, 바람막이 점퍼, 낚시 조끼, 트레킹화 등 아웃도어 아이템을 일상에서 무신경하게 입는 게 트렌드라는 이야기다.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니다. 해외 여행이나 동창회, 심지어 출근길에도 아웃도어를 즐겨 입는 40~50대 중년 남자들이 이런 모습 아닐까. 이미 업계에서는 고프코어를 ‘대디 코어(Daddy Core)’와 혼용한다. 집업 등산복 티셔츠에 고무줄로 조이는 반바지를 입는다거나(랑방), 펑퍼짐한 아노락 점퍼에 캠핑용 모자를 쓰는(루이비통) 등 컬렉션의 모델 옷차림이 낯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샌들에 두꺼운 면 양말을 신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베트멍·버버리의 올 봄·여름 광고 캠페인 역시 고프코어 트렌드를 그대로 보여준다. 슈트와 스커트에 형광 바람막이나 등산 점퍼를 짝짓고, 넉넉한 낚시 조끼를 걸치는 스타일링이다. 지금껏 눈흘기던 아재 패션, 그러니까 패션 테러리스트 일순위에 오르던 촌스럽고 감각 없는 옷차림이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르는 반전이다.
설마 진짜 트렌드가 될까 싶다고? 이미 고프코어 스타일 중엔 젊은 층에 인기를 끄는 아이템도 생겼다. 바로 허리에 매는 가방, 패니 팩이다. 구찌가 지난해 남녀 정장 차림에 이 패니 팩을 선보인 이래 올해는 거의 모든 브랜드가 출시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촌스럽기 그지 없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래퍼 에이셉라키, 모델 켄달 제너와 벨라 하디드 등 패셔니스타들이 이를 장착한 모습이 파파라치 사진에 등장하며 순식간에 대세가 됐다.
“추한 것은 매력적이다, 더 새롭기 때문”
왜 굳이 옷을, 신발을 아름답지 않게 만들고 입느냐고 묻는다면, 프라다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의 대답을 참고하자. 이미 1996년 ‘추하지만 아름다운’이라는 주제로 컬렉션을 열었던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도전 정신을 강조한다.
크리스토퍼 케인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에만 빠져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거다.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게 진짜로 어글리한 일이다.”
어글리 시크는 과거 10여 년 이상 패션을 지배해 온 주류에 대한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트렌드를 이끈 건 럭셔리 브랜드였다. 장인 정신으로 대표되는 완벽한 공정, 어디서도 보지 못한 고급 소재를 내세웠다.
하지만 예쁜 꽃도 자꾸 보면 지겨워지는 법. 새로운 걸 원하게 된 대중은 깔끔하게 차려 입은 슈트 대신 운동복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놈코어(Normcore·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스타일)’라는 이름으로, 무심한 듯하면서도 나름의 감각을 자랑하기 좋은 옷들이 더 주목받았다. 요 몇 년 유행을 이끈 애슬레저룩(일상복으로 어색하지 않은 운동복 차림)부터 란제리룩, 파자마 패션 등은 여기서 비롯됐다. 어글리 시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더 촌스럽고 모자라 보이는 너드룩, 80~90년대 복고까지 더하면서 못생김을 연출하는 것이다.
어글리 시크가 도전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이끈 디자이너들이 패션계의 새 얼굴이었다는 건 우연이 아닐 터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발렌시아가의 뎀나바잘리아가 그들이다. 2015년 브랜드 내부에서 발탁돼 디자인 수장이 된 미켈레는 그 전까지 업계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뉴페이스였지만 단박에 구찌의 이미지를 변신시켰다. 관능적 여성미를 강조한 과거와 달리 남녀 구분을 없애고 이제는 ‘구찌화(guccification)’로 명명되는 화려한 빈티지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아름다움의 기준조차 모호해진 시대
이런 논리라면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어글리 시크가 자리 잡는 좋은 토대가 될 수 있다. 동덕여대 정재우 교수(패션학)는 “유행은 결국 대중이 낯선 것을 수용할 때 일어난다”면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과 동영상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점점 거부감이 사라지고 오히려 예뻐 보이기까지 하는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선과 악, 호와 불호가 아닌 ‘다른 취향’일 뿐이라는 것. “어글리 시크라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움의 반대가 아닌 그 안에 내재해 있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각 브랜드·퍼스트뷰코리아·연합뉴스·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