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인생은 항상 머뭄과 떠남의 연속이어서일까. 늘 어느 구석엔가 아쉬움이 머물다 사라진다. 그것은 이른 봄을 시샘하는 싸늘한 날씨와 같은, 새로움과 까칠한 불안이 감도는 그런 것이다. 이사를 가려고 준비하다 보니 먼저 해야 할 것이 가질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좋아서 구입했던 물건들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사용하지 않고 방구석에 머물던 것은 어떻게 처분할까? 이삿날은 며칠로 잡을까. 되도록이면 이삿짐을 반으로 줄여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차의 핸들을 잡고 눈 날리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문뜩 관리소 사무실에서 만난 사원의 ‘예쁜 이름’이 생각났다. ‘박꽃하얀’. 여름날 초가지붕에 얹혀있는 박꽃, 초저녁달이 뜨면서 달빛에 눈이 부셔 하얀색으로 변한 그날 밤의 추억처럼 옛 생각에 젖어들게 하는 그런 이름이었다. ‘그의 엄마와 아빠는 아이를 임신하고 또 태어날 무렵 이름을 지을 때, 얼마나 아름답게 키우고 싶었을까’.
지난가을, 추석명절을 보내고 아들은 훌쩍 집을 떠나 군인이 되겠다고 나섰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왠지 잘 해낼 수 있을까, 곧 겨울이 될 턴데 감기는 안 걸리고 훈련에 임할 수는 있을까, 훈련받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저절로 엉켜들었다. 그때도 아들의 훈련을 맡은 훈련담당 교육관의 이름은 ‘서탄탄’이었다. “당신의 귀한 자녀를 제가 책임지고 건강하고 튼튼하며 탄탄하게 만들겠습니다” 하는 뜻처럼 들렸다.
사람들 모두는 자신의 직책과 이름이 있다. 그것은 그렇게 살겠다는 뜻이고 거룩하고 의미 있는 삶의 이름이다. 세월이 흘러 한겨울에 아들의 임관식을 보고 돌아오는 날, 멀리 보이는 지리산 산봉에 흰 눈이 새해를 말해주듯 아들이 훌쩍 커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무심한 생각도 들었다. 한 해 또 한 해, 지나온 세월도 마음도 기다림도 없는 시간도 내 곁에 다가왔다 물러나듯이 무술년 새해에는 작년처럼 아프지 말고 건강하며 박꽃하얀의 이름처럼 정성된 청정한 마음으로 작은 수행과 깊은 감동으로 살고자 다짐한다.
내가 가는 길 멈추지 말길
당신이 가는 길 후세 사람들의 옛 추억이 되길…
원광대 박물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