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개의 진화
개와 늑대 유전자는 99% 이상 일치
1만8000~3만2000년 전 일부 늑대
턱 작고 이빨 약한 개로 슬슬 진화
사람이 먹다 버린 고기 얻어 먹어
인류 정착하자 함께 주거지 안으로
사람과 같이 살면서 유전자도 변해
녹말 분해 아밀라아제 효소 많아져
반려견은 이제 자연에선 생존 못해
그렇다면 늑대는 언제 늑대가 되었을까? 불과 450만~900만 년 전의 일이다. 이때 여우와 늑대가 갈라섰다. 그리고 180만 년 전에는 코요테가 갈라져 나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늑대는 180만 년 전 늑대와 같은 모습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화석이 말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개가 늑대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이야기도 화석에서 시작했을까? 아니다. 사람들은 굳이 화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개가 늑대에서 온 줄 눈치챘다. 늑대는 북아프리카, 유라시아,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다양한 종으로 분포하며, 생김새와 무리를 이루는 습성 같은 특징이 개와 비슷하다. 게다가 개와 늑대의 유전자는 99% 이상 일치한다. 따라서 개의 조상이 늑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게 없는 듯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간단치 않다. 늑대가 사람에게 온 후에 개로 진화했을까, 아니면 늑대가 개로 진화한 후에 사람에게 왔을까?
개와 사람 가운데 누가 먼저 선택했을까
늑대는 구석기시대에 이미 개로 사람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진화했다. 개는 늑대보다 이빨이 작고 턱이 약했다. 이 개들은 늑대와 비슷한 생활을 하다가 구석기시대에 수렵활동을 하던 사람들 주변에 배회하기 시작했다. 늑대보다 턱이 약하고 이빨이 작은 개들은 불과 무기를 소유하고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먹다 버린 고기를 얻어먹는 게 안전하고 유리했다. 사람들은 초식 포유류의 이동경로도 잘 알고 있었으니 그들을 쫓아다니면 직접 사냥을 하기도 좋았다. 수렵채집인의 입장에서도 개는 유용했다. 곰 같은 대형 육식동물의 접근을 알려 주는 경보장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정착하자 개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주거지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유순한 개들을 내쫓지 않고 먹이와 안식처를 제공했다.
일단 사람과 함께 살게 된 개는 유전자도 변했다. 특히 뇌의 발달과 탄수화물 대사에 필요한 부분이 크게 바뀌었다. 농사는 사람들에게 녹말을 섭취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 주었다. 사람에게 얻어먹는 형편이 된 개 역시 여기에 적응해야 했다. 늑대의 유전체에는 염색체마다 녹말 분해 효소인 아밀라아제(amylase) 유전자(AMY2B) 복사본이 한 개씩 들어 있는 데 반해 개의 경우에는 같은 복사본이 2~15개 있으며 늑대보다 평균적으로 일곱 개 더 있다. 올리고당을 소화하는 효소와 장에서 포도당을 흡수하는 단백질 유전자 활성도 높아졌다.
하지만 사람과 달리 개의 침에는 아밀라아제 효소가 거의 없다. 개는 제대로 씹지 않고 꿀꺽 삼킨다. 아무리 씹어 봐야 화학적 소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화학적 소화가 일어나지 않으니 녹말이 단당류나 이당류로 분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작은 크기의 당 분자를 먹고사는 충치균이 발생하기 어렵다. 덕분에 개는 양치질을 하지 않아도 충치가 생기지 않는다. 만약 개의 아밀라아제 유전자가 사람처럼 많아졌다면 개는 사람과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뇌의 발달과 관련된 유전자도 늑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석기인들이 길들이기 쉬운 동물들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개가 등장한 시기가 신석기시대든 구석기시대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사람이 개 또는 늑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개 또는 늑대가 사람을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의 개 품종은 150년 사이 인간 작품
우리가 알고 있고 키우고 있는 개들은 불과 최근 150여 년 사이에 사람들이 만들었다. 현대의 개 품종은 무려 400여 종에 달한다. 엄청나게 다양하다. 개와 고양이, 족제비, 사향고양이, 물개와 바다코끼리 같은 육식 포유동물을 식육류라고 한다. 식육류의 다양성은 6000만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자연선택이 만든 결과다. 그런데 고양이와 바다코끼리 사이의 두개골 차이보다 불과 150년 동안 인위선택(人爲選擇)으로 등장한 개 품종 사이의 두개골 차이가 더 크다. 이게 다가 아니다. 경비견, 목축견, 애완견은 용도가 다르니 생김새도 다르다. 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두개골의 차이보다 애완견 안에서 나타나는 두개골의 차이가 더 크다. 사람들이 개를 육종하고 고를 때 용도보다는 생김새를 더 많이 염두에 둔다는 뜻이다.
늑대가 개가 되는 자연선택의 과정은 최소 450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150년밖에 걸리지 않은 인위선택으로 개는 수백 종이 되었다. 자연보다 인간의 힘이 더 세다. 문제는 우리가 키우고 있는 개는 결코 자연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 매년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개가 10만 마리다. 수만 년 전 개가 사람을 동반자로 선택했을 때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자연선택 대신 인위선택에 맡겨진 개의 운명은 너무나도 씁쓸하다.
늑대가 한국서 멸종위기 아닌 까닭
개속에는 코요테와 회색늑대(Canis lupus)가 있다. 이리와 말승냥이는 회색늑대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살던 늑대, 인도늑대, 히말라야늑대뿐만 아니라 개(Canis lupus familiaris)와 딩고(Canis lupus dingo)도 회색늑대의 아종이다. 딩고는 원래 동남아시아에 살던 개였는데 3000~4000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야생동물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여우는 1급 멸종위기종인데 반해 늑대는 멸종위기종이 아니다. 왜냐하면 늑대는 1967년에 마지막 개체가 포획되고 멸종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멸종해서 멸종위기에서 벗어난 셈이다. 호랑이가 천연기념물이 아닌 이유도 마찬가지다.
연세대 생화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독일 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안양대 교수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역임. 『달력과 권력』『공생 멸종 진화』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