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전, 쾌활한 인사로 손님을 맞는 제이 슈(54)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장 얼굴이 익살스런 웃음으로 물들었다. 슈 관장은 조각보를 변주한 넥타이를 하고 나와 환영의 뜻을 표현했다. 미국 내 주요 미술관에서 처음 열리는 본격 한복 전시회 ‘우리의 옷, 한복(Couture Korea)’을 개최하는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 복식 전문가인 조효숙 가천대 부총장을 접견실로 안내한 슈 관장은 직접 차를 따라주며 두 기관의 만남을 기뻐했다.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목표로 하는 아름지기, 과거와 현재의 독특한 만남에서 혁신을 꾀하는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의 뜻이 맞아떨어졌어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동서양 젊은 실무자들의 의기투합이 멋진 전시로 열매 맺어 행복합니다.”
슈 관장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처음 미국 주요 미술관의 관장직에 오른 인물답게 아시아 미술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사명감이 남달랐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KF)이 여는 ‘해외 큐레이터를 위한 한국미술워크숍’에 2003년부터 세 차례 참여해 “나는 KF가 낳은 한국통 아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기울이는 애정이 깊다. 이번 한복 전시는 이런 오랜 교류와 인연이 낳은 결실인 셈이다.
아름지기 옷공방의 치밀한 한복 재현
투명할 지경으로 곱게 짠 비단으로 되살린 영조 대왕의 도포,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두루마기 ‘심의’, 저고리 위에 입는 때깔 좋은 배자, 여성들이 치마 밑에 받쳐 입던 속곳, 저고리와 치마로 이뤄진 여성 한복 일습, 아이들이 돌잔치 때 입던 색동 돌복 등이 관람객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시 전반을 지휘한 조효숙 공방장은 “한복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와 장식물 등을 운송하는데 제약이 많고 보험 문제까지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작전을 펼쳐야 했다”고 들려주었다. 털 종류 섬유가 첨가된 한복은 냉동 상자에 넣어 운반하고, 상아 같은 동물 뼈 장식은 빼야하는 등 의외의 어려움이 많았다는 얘기다.
한복에서 영감을 얻어 그 형태나 정신을 재해석한 현대 디자이너들의 협력도 눈부셨다. 원로 디자이너 진태옥(83) 선생과 중견 디자이너 임선옥(55)씨, 젊은 디자이너 정미선(33)씨 세 사람이 선보인 의상은 각기 추구하는 패션 철학과 전통의 정신이 맞물려 21세기 한복의 새 가능성을 보여줬다. 활옷의 미감을 이어받은 치마,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소재를 잡은 드레스를 내놓은 진태옥 선생의 전시실은 샤넬의 칼 라거펠트(79)가 한국 나전칠기와 보자기 등에서 주제를 가져온 근작과 나란히 전시돼 호평 받았다. 이는 외국 디자이너들이 한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작을 내놓는 흐름이 더 확산될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줬다. 임선옥, 정미선씨는 현대 여성이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편안한 소재와 실루엣을 추구하면서도 전통 생활공간에서 한복이 지녔던 패션 감각을 되살려내는 의미 있는 실험으로 젊은 관람객들의 흥미를 끌었다.
패션 디자이너들의 한복 실험
제이 슈 관장은 “K팝이나 K드라마를 능가할 K패션의 가능성이 무궁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고려자기, 조선 나전칠기 등 800여 점의 한국 소장품을 현대 작품과 조화시켜 6개월 마다 교체 전시하고 있는데, 마침 한복 전시를 맞아 7일부터 한국 미술 상설 전시실에서 초상화‧장신구‧보자기 등을 선보여 관람객의 이해를 도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1일 오후 미술관 내 삼성홀에서 열린 프리 오프닝에는 주최 측인 신연균 아름지기 이사장과 조효숙 가천대 부총장이 나서 현지 교민, 미술관 후원회 주요 인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슈 관장은 “역사와 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시대를 뛰어넘는 정체성을 일궈나가는 한국의 오늘이 한복 전시에 선명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우리 미술관의 정신을 드높인 아름지기와의 협업에 감사한다”고 건배했다.
전시장 들머리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한복 입는 법’과 한복을 짓는 과정을 담은 영상물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명세 감독이 발레리노 김용걸과 전통 춤꾼 김미애 부부를 모델로 만든 영상물을 넋 놓고 바라보던 한 관람객이 나지막한 한마디를 터트렸다. “쏘 뷰티플!”
샌프란시스코(미국) 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 아름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