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 빠져 헤매는 보수 진영
자유한국당의 친박 청산 작업도 혁신이란 이름을 내걸고는 있지만 결국 힘겨루기로 비치는 양상이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지난 17일 “친박은 지금 자동 사망 절차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 윤리위가 친박 핵심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에게 ‘탈당 권유’ 징계를 내렸지만 당사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의원총회를 열어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이들을 출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천막당사, 총선 불출마 선언 등
위기 때마다 자기 헌신 사라지고
지금은 각자도생 분위기만 팽배
“선거 질 각오로 혁신에 매진해야”
홍 대표는 왜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까. 친박 핵심 두 명을 불명예스럽게 쫓아낸다고 해서 한국당 지지율이 올라갈 거라는 근거는 희박하다. 하지만 친박의 입지를 좁히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친박 핵심 관계자는 “홍 대표의 리더십 문제를 제기하면 자신들의 밥그릇 지키기로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놨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홍 대표로선 현역 국회의원이 아닌 당 대표라는 한계를 극복하면서 당을 장악해 나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집안 싸움 속 인재도 리더십도 부족
정한울 여시재 솔루션 디자이너는 “가장 이상적인 건 촛불정국 때 당을 깨는 게 아니라 친박이 스스로 권력을 내놓고 개혁파 중심으로 당 지도부를 꾸리는 것이었다”며 “현실은 친박은 버티고 비박은 그들을 공격하기 바빴고, 그러다 보니 보수 진영이 대통령 탄핵 이후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 게 아무것도 없게 됐다”고 말했다.
역사 속에서 보수는 위기 때마다 자기 헌신과 뼈저린 반성을 통해 반등의 계기를 찾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이 거세게 불었을 땐 박근혜 대표를 내세우며 천막당사를 차렸다. 한동안 대여 공세도 취하지 않고 “우리가 반성하고 있다”는 메시지만 일관적으로 내놨다. 당 연수원을 매각하고 그 대금을 국고로 환수 조치하는 등 철저한 자기반성과 혁신 노력으로 신뢰를 회복하려 했다. 그 결과 3개월 만에 지지율은 회복됐고 2006년 지방선거 승리에 이어 2007년 대선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의 ‘형님 예산’ 논란이 불거졌을 때는 남경필·정병국·김세연·황영철 의원 등 한나라당 소장파 22명이 의원직을 걸고 제동을 걸었다. 국회 예산안 표결 때 거수기를 하지 않겠다며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쳤다. 2011년 정권 재창출 위기 때는 3선의 원희룡 의원을 시작으로 불출마 선언이 이어졌다. 김형오·홍정욱·장제원·현기환·박진 의원도 불출마 대열에 합류했다. 자발적으로 인적 쇄신이 이뤄진 뒤 박근혜 비대위원장 체제하에 똘똘 뭉치면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현재 보수 진영에선 ‘우리가 바뀌어야만 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은 전혀 없고 여전히 나만 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다”며 “공천 과정에서 보수의 미래를 맡길 만한 인재를 발굴하지도 못했고, 그러다 보니 천막당사 때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들 만한 리더십도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감동 없는 보수 통합, 지지율은 제자리걸음
바른정당도 한국당의 구심력을 벗어나기 위해 대립각을 세우는 데 몰두하다 보니 보수층 전반의 위기를 해소할 만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대선 이후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한국당은 10%대 초중반, 바른정당은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러 있다. 오랫동안 보수 정당 지지자였던 TK와 60대 이상에서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이 20%가 넘는다.
정한울 디자이너는 “지지율 하락은 국민이 보수를 대안 세력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며 “지난 10년간 집권여당으로서 이런 사태를 촉발한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개혁에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하면서 선거를 치러도 부족할 판에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보수 통합만 추진해 놓고 표를 달라고 하면 누가 그걸 혁신이라고 생각하겠느냐”고 꼬집었다. 그는 “이대로 가면 보수 진영은 앞으로 10년 이상 집권하긴 힘들 것”이라며 “선거에서 이겨 보려고 아등바등만 할 게 아니라 져도 좋다는 각오로 내부 혁신에 매진하는 게 선결 과제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