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의 성장 모델 일본 라쿠텐
온라인 쇼핑몰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한 미키타니 회장은 인수합병(M&A)으로 사업을 키워 나갔다. 2000년대 초부터 증권·카드·은행 등 금융업체를 잇따라 인수하고, 2014년에는 비밀 통화 기능을 갖춘 모바일 메신저 ‘바이버’를 9억 달러(약 1조원)에 사들였다. 일본 여행업계 1위 업체 ‘라쿠텐 트래블’ 역시 계열사다. 서로 연관관계를 찾기 힘든 개별 서비스를 유기적으로 묶는 건 바로 ‘라쿠텐 수퍼 포인트’ 시스템이다. 수많은 이종 서비스를 단일 생태계에 묶은 전략 덕분에 회사 모태라 할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 ‘라쿠텐 이치바(市場)’의 연간 거래액은 1조4460억 엔(약 14조4400억원)이다. 2위 업체인 아마존재팬(7300억 엔)의 두 배에 달한다.
하버드서 MBA 마치고 97년 창업
영어 못하면 해고, 게이단렌 탈퇴
쇼핑몰서 쌓은 ‘수퍼 포인트’로
커피값 내고 여행 갈 때도 활용
이종 서비스, 단일 생태계에 묶어
네이버·롯데도 벤치마킹 나서
창업 20년 만에 일본 4위 부자로 떠올라
비록 라쿠텐이 온라인 쇼핑 등 내수 기반 업종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미키타니 회장은 항상 미국식 사고를 앞세운다. 일본에 뿌리에 두고 있지만 1억 일본인보다는 60억 전(全) 지구인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도 여기서 나왔다. ‘영어 못하면 해고(No English, No Job)’ 정책이 대표적이다. 7년 전 미키타니 회장은 사내 모든 임직원의 의사소통, 문서 작성을 영어로만 하도록 지시했다. ‘사내 영어 학습회’를 운영하고 야근 대신 ‘영어 야학’을 장려하면서 반대하는 사원에게는 “그냥 나가라”고 했다. 라쿠텐 직원들의 토익 점수는 2010년 평균 526점에서 5년 뒤 800점으로 올랐다. 라쿠텐이 2012년 캐나다 e북 유통 업체 코보를 인수한 이면에는 직원들이 영어 사용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난 것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평도 나온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라쿠텐의 과감한 글로벌 M&A 행보는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를 제외하면 일본 기업들 사이에선 상당히 드문 케이스”라며 “영어 공용화를 비롯해 창업자가 가진 글로벌에 대한 관심만큼 그 기업이 글로벌화되는 것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미키타니 회장은 삶의 방식도 윗세대 일본 경영인과 차이가 두드러진다. 작은 집에 소박하게 사는 게 미덕인 일본에서 도쿄 중심가 시부야의 4억9000만 엔(약 50억원)을 호가하는 호화 맨션을 보란 듯이 사들인 것부터가 파격이다. 실제 대부분의 시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저택에서 보낸다. 현재 미키타니 회장의 재산은 포브스 추산으로 60억 달러(약 7조원)에 이른다. 정보기술(IT) 부문에선 세계 29위, 일본 4위의 부자다.
프로야구팀 창단하고 바르셀로나 후원도
미디어 산업 진출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미 2005년 라쿠텐은 지상파 도쿄방송(TBS)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다. 2007년에는 기존 TBS 경영진과 주주총회에서 위임장 대결까지 벌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방송의 공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일본에서 지상파 방송 인수 시도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그는 “인터넷과 방송은 충분히 결합될 수 있다. 흥미롭고 해볼 만한 사업이지 않은가”라며 일반 대중의 통념에 저항했다. 지금까지도 라쿠텐의 TBS 인수 시도는 2000년 블로그서비스 업체 ‘라이브도어’의 후지TV 인수 시도와 함께 일본 미디어 업계에 회자되고 있다.
요미우리·한신 등 기존 구단들이 매우 보수적인 일본프로야구(NPB)에서도 라쿠텐은 유일하게 신규 진입에 성공한 사례다. 2005년 창단한 도호쿠(東北) 기반의 라쿠텐 골든이글스는 1965년 NPB 창설 이후 50년 만에 처음 생긴 프로야구팀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최근 매각설이 다시 나도는 넥센 히어로즈의 가장 유력한 인수처로 꼽히는 곳이 카카오”라며 “이번에도 라쿠텐 루트를 따라갈지 흥미롭다”고 말했다.
포인트 쓸 수 있는 가맹점만 4만2000개
한 이동통신업계 관계자는 “금융업과 온라인 판매를 결합하려는 카카오의 움직임은 ‘라쿠텐뱅크-라쿠텐 수퍼 포인트(결제포인트)-라쿠텐 이치바(소매)’가 그 원형”이라며 “일각에서 마구잡이로 비판하는 카카오의 M&A도 라쿠텐의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미키타니 회장은 이미 10년 전부터 인터넷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라쿠텐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라쿠텐 경제권’ 구상을 발표했다.
실제로 카카오가 최근 선보인 서비스 중에선 카뱅을 차치하고라도 라쿠텐의 서비스를 응용한 경우가 많다. 지난해 7월 시작한 미용실 정보 서비스 ‘카카오 헤어샵’은 ‘라쿠텐 뷰티’와 유사하다. 라쿠텐 뷰티는 일본 내 약 6000곳의 미용실을 검색하고 실시간으로 예약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앱)이다. 또 라쿠텐이 2001년 라이코스 재팬을 사들인 것처럼 카카오도 2011년 포털 서비스 ‘다음’을 인수했다. 카뱅이 사업 초기부터 모델로 삼은 라쿠텐뱅크는 출범 10년 만에 누적 계좌 600만 개, 연평균 45%씩 성장했다.
김동희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핀테크를 비롯해 한국 인터넷 사업자들의 최근 플랫폼 확장 전략은 약 10년 전 라쿠텐이 선제적으로 시도해 온 것”이라며 “카카오뿐 아니라 네이버 역시 ‘네이버 쇼핑-네이버 페이-네이버(포털)’를 연결해 사용자의 체류 시간, 소비액 등을 늘리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롯데도 지주사 소속 경영혁신실 주도로 라쿠텐의 유통·금융 결합 비즈니스 모델을 집중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