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전략] 베를린장벽 왜 무너졌나
동독 정권은 이 장벽을 파시즘방지벽으로, 또 이날을 독일민주공화국의 실질적 건국일로 불렀다. 베를린장벽과 붙어 있던 서베를린 폐허 건물 하나가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 나치스친위대(SS), 제국보안본부(RSHA) 등 1933~1945년 나치 정권 공포정치 기관들의 본부였기 때문에 그런 선전이 더욱 통했다.
글라스노스트 표방 고르바초프 때
수십만 명 헝가리 등 거쳐 우회 탈출
일부 서독 방문 곧 허용 발표하며
“즉시 개방” 얼떨결에 말해 붕괴 시작
휴전선·북중 국경 둘러싸인 북한
완전 봉쇄 어렵다면 반대 전략을
약 1000명의 동독인들 담 넘다가 숨져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견고한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두드림이 계속되었다. 1971년 동독에서 탈출한 미카엘 가르텐슐래거는 1976년 3월과 4월 동서독 경계선에 설치된 동독의 대인지뢰 SM-70을 탈취하여 세상에 공개했는데, 5월의 탈취 시도 때에는 동독 국경수비대 총격에 즉사하고 말았다. SM-70의 비인도적 잔혹성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고, 당시 외환 부족을 겪던 동독 정부는 국제사회의 압력에 따라 SM-70을 동독 철조망에서 철거했다.
베를린장벽의 수명은 30년을 넘기지 못했다. 1989년 5월 헝가리 정부는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한 소련 고르바초프 정부의 지원하에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했다. 9월 동독인 수십만 명이 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오스트리아·서독을 차례로 우회하여 탈출하기 시작됐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를 차단하려 동독인의 체코슬로바키아 입국을 금지했다. 10월 동독 지도부가 교체된 후에 동독-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은 다시 개방됐지만 동독인의 쇄도로 양국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어수선한 시절 동독 정권이 전혀 의도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일부 여행객에 한해 서독으로 바로 갈 수 있게 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의 질문을 받은 동독 관리가 출국을 즉시 허용한다고 얼떨결에 말하게 되었고 이에 언론은 베를린장벽을 포함한 동서독 경계선이 모두에게 즉시 개방된다고 보도했다. 이날 밤 수천 명의 동독 사람들이 베를린장벽에 모였고 동독 국경수비대는 이들의 출국과 귀국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 개방 4일 동안 전체 동독 인구 약 4분의 1이 서독을 방문했다. 1990년 7월 1일 동서독 분단선은 설정된 지 꼭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철폐됐고, 10월 동서독은 마침내 하나의 독일로 재통일됐다.
그렇게 넘기 어렵던 베를린장벽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던 동독 시민들이 무너뜨렸다. 담이 아무리 높더라도 내부 변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몇 곳에서만 길게 세워진 베를린장벽을 볼 수 있다. 슈프레강변 따라 가장 길게 보존된 1300m의 베를린장벽인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는 그라피티로 유명하다. 분단 시절 베를린장벽 벽화는 서베를린 쪽에만 있었다. 동베를린 쪽 벽면은 접근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벽 붕괴 직후인 1990년 2월부터 세계 여러 나라 예술가들이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장벽의 동쪽 벽면에 그림을 그렸다.
외부와 단절해 ‘우물안 개구리’ 보호
사실 담은 보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외부와 단절하는 담은 대체로 ‘우물 안 개구리’(내부의 지배 집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세운 담이 장기적으론 자신을 구속하여 패가망신에 이르게 만들기도 한다. 즉 담은 단기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만, 장기적으론 그렇지 못하다.
서독 정부는 베를린장벽이 세워져 있던 28년 동안 4만 명에 가까운 동독 정치범과 25만 명에 이르는 그들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약 2조원의 돈을 동독에 지불했다. 이른바 ‘프라이카우프’다. 동독에 돈을 줘도 서독을 위협할 동독 군사력 증강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3년의 치열한 전쟁과 수십 년의 각종 도발을 겪은 남북한 관계는 동서독과 다른 상황임은 물론이다. 남북한 간의 담은 살아서 넘기는커녕 죽어서도 넘지 못할 정도로 높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37번 국도변에는 북한군 묘지가 있다. 6·25전쟁이나 이후 도발에서 사망한 북한군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무장공비 침투 사실을 부인하는 북한 정권은 유해 인수를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잠수함 등 결정적 증거가 있었던 1996년 강릉 무장공비의 유해만 인수해 갔을 뿐이다. 북한 정권은 잠수함 승조원들이 무장공비가 아니라 잠수함 고장으로 임시 상륙한 난파 선원이었고 남측이 이들을 무참히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 외의 북한군은 죽어서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와 달리 중공군 유해 437구는 2014년 3월 중국으로 송환됐다. 현재 남한 내에서 발굴·확인됐지만 본국으로 송환되지 못한 중공군 유해는 없다. 발굴된 미군의 유해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과 평북 운산 지역에서 발굴된 225구의 미군 유해는 약 3만 달러의 돈이 북한에게 지급된 후 미국으로 송환된 바 있다.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대한민국 국군의 유해는 2012년 5월 처음으로 남한에 돌아왔다. 그러나 북한이 바로 남한으로 보내 준 것은 아니다. 미국·북한 간의 협약에 의해 미국이 북한에게 발굴 비용을 주고 미국이 전달받은 유해 가운데 국군의 것으로 판명된 유해가 남한으로 돌아온 것뿐이다. 남북한 간에는 죽어서도 넘지 못하는 담이 존재하고 있다. 자유왕래, 이산가족 상봉, 유해 송환 등이 불가능한 이 높은 담은 무엇보다도 북한 정권이 쌓은 것이다.
북한의 담이 얼마나 견고할까가 오늘날의 주요 관심사다. 동독에 155km 베를린장벽과 1400km의 동서독 경계선이 병존했듯이, 북한에는 155마일의 남북 군사분계선과 1400km의 북중 국경선이 존재하고 있다. 동독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폐쇄와 개방에 주변국은 큰 영향을 미친다. 현재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우려하는 주변국들은 북한 봉쇄를 통해 북한을 개방시키려는 매우 역설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가장 긴 경계선을 가진 중국의 비협조로 완전 봉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효과가 별로 없었다. 중국 역시 정치적으론 닫힌 체제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면이기도 하다.
불완전한 대북 봉쇄는 북한 개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만일 완전한 봉쇄가 어렵다면 차라리 반대의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베를린장벽을 포함한 모든 철옹성은 우회나 내부 이탈에 유난히 약했다. 어떤 체제든 쇄국 일변도로 오래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