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는 지금<상> 둔황 가는 길
“달밤이다. 먼 달빛의 사막으로 사자 한 마리가 가고 있다. 무거운 몸뚱이를 이끌고 사구(沙丘)를 소리 없이 오르내린다. 매우 느린 걸음이다. 쉬르르 쉬르르 명사산의 모래가 미끄러지는 소리인가. 사자는 아랑곳없이 네 발만 차례차례 떼어 놓는다….”
고속도로변은 산림 녹화 한창
칭하이호 유채, 만년설과 대비
풍력·태양광발전소 규모 상상 이상
간이식당에서도 와이파이 터져
버스 기사 운행 체크 후 강제 휴식
CNN도 한류 드라마도 볼 수 없어
상하이 푸둥공항에서의 환승은 중국을 실감케 했다. 아무런 설명 없이 네 시간 늦게 출발한 연결항공은 밤 2시에야 시닝에 도착했다. 이튿날 새벽 대절버스에 몸을 실었다. 고속도로변은 산림녹화가 한창이다. 중국 최고 오지라는 책자의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해발 3300m에 위치한 거대 호수 칭하이호 주변은 유채꽃 바다다. 샛노란 유채 들판과 치롄(祁連)산맥의 만년설은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었고 무선통신망은 이 경이로운 풍광을 서울로 보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거대한 칭하이 호수를 지나 해발 4000m에 가까운 차카(茶卡)고개를 넘어설 때쯤 코피를 쏟거나 두통을 호소하는 일행이 나타났다. 고산병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버스는 차카옌호에 도착했다. 거대한 소금호수, 중국의 유우니라는 별명이 어울린다. 사방 짠 냄새, 소금의 지평선이다. 버스는 다시 300여㎞를 이동한 끝에 우란(烏蘭) 현도(縣都)에 도착했다. 맙소사, 낡은 소형 버스로 하루 달린 거리가 800㎞에 육박했다. 서울~부산을 당일 왕복한 셈이 된다. 답사여행은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 열흘간 4000㎞를 달린 고생길이었다.
단정한 복장의 기사는 규정속도를 지키고 있었다. 윗옷을 벗어젖히면 용 문신이 꿈틀거리는 풍경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운전하는 기사는 적어도 외국인 대절 버스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실제로 칭하이성과 간쑤성 경계에 들어서니 공안이 차를 세운다. 휴식시간을 체크해 보더니 기사에게 30분 강제휴식을 명령했다. 우리가 어렵게 추진 중인 운전기사 강제휴식제가 이미 실행되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도 중국은 중국이다. 사방에서 들리는 클랙슨 소리는 심벌즈처럼 쾅쾅 놀라게 한다. 귀를 막아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중간중간 들리는 도로변 화장실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문짝 없이 완전히 노출된 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차창 밖 멋진 인프라와는 대조적으로 인민들의 실생활은 여전히 고단해 보인다.
둔황으로 가는 길, 뉴스가 아쉬웠다. 객실에는 중국 매체만 나온다. CNN도, BBC도 없다. 그 많던 한류 드라마도 없다. 유심히 지켜본 중국 TV의 주제는 딱 세 가지 정도였다. 공산당 혁명 찬양 아니면 공안이 나쁜 놈들을 무자비하게 패기 또는 무협지가 전부다. 이 같은 분위기는 현재 중국에서 박스오피스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영화 ‘전랑(戰狼)2’로 설명된다. 중국 특수부대 요원 전랑이 아프리카 국가를 무대로 영웅이 된다는 뻔한 줄거리다. 서방세계에 대한 열등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콤플렉스 덩어리인 힘센 이웃과 사사건건 부닥쳐야 하는 우리 현실이 우울하다. 미래학자들은 세계의 헤게모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중국에 살아 본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고 한다. 강대국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존경받는 국가로 거듭나기는 영원히 힘들 것이라고. 그러나 체제와 달리 이름 모를 들꽃들이 나부끼는 대륙의 늦여름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이제 나락은 금빛으로 물들고 들녘의 콩들은 뙤약볕에 스스로 여물어 갈 것이다. 차창 밖 여름이 저 혼자 푸른빛을 시름시름 잃어 가고 있다. 내일이면 둔황이다.
서강대 MOT 대학원에서 기업홍보(언론학)를 강의한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박사. KDI 연구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EBS 이사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칼럼을 써왔으며 그의 에세이는 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저서로 『신문경영론: MBA 저널리즘』 『철학자들의 언론 강의』(역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