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작곡가 라예송은 안성수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봄의 제전’이 아니라, 안성수의 춤 ‘장미’에서 얻은 영감으로 전혀 새로운 곡을 쓰기 시작한 것. 전위적인 한국음악 신곡과 한국적인 현대무용 신작이 동시에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최수진·성창용·이주희 등 최고의 춤꾼이 한데 어우러지고 현란한 리듬의 오고무와 라이브 악사 5명이 함께 조명받는 이 굿판을 두고 안 단장은 “찬란했던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축복하는 시간여행”이라고 했다. 안무가 안성수·작곡가 라예송·무용수 최수진과 함께 그 ‘시간여행’을 먼저 다녀왔다.
빠르다. 분명 국악기 소리지만 몹시 도전적으로 들리는 음악, 거기 맞춰 ‘댄싱9’의 스타 최수진 등 무용수 15명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움직임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뽀얗게 분칠한 북 세트를 농락하는 요염하고 도발적인 오고무 춤사위도 기막히다. 14일 오픈 리허설을 함께 참관한 국립국악고·서울예고 학생 40여 명도 눈을 반짝이며 숨을 죽였다.
국립현대무용단 ‘제전악-장미의 잔상’ 만드는 안성수·최수진·라예송
평소 안성수의 팬이었다는 라예송 작곡가는 “단장님이기에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고, 안 단장은 “처음 만들어온 2분짜리 곡부터 나를 잘 파악하고 있더라”며 놀라워했다. “국악고 시절부터 무용하는 친구들을 도와주곤 했지만, 전통무용엔 관심이 없고 계속 다른 걸 찾았어요. 마음에 드는 창작 무용을 찾다가 단장님 작품을 만났죠. 좋아하는 안무가가 갑자기 큰 작품을 맡겨주시니 떨리기도 했지만 꼭 잘하고 싶었습니다.”(라)
- ‘한국판 봄의 제전’을 기획했는데,
그런 혁명을 원한 건가요. - 안: 그건 아니고 ‘봄의 제전’ 음악이 상당히 매력적이잖아요. 국악기로 재해석해보고 싶었는데, 라 선생님이 그건 아니라더군요. ‘한국판 봄의 제전’은 물건너 가고 ‘장미의 잔상’이 됐죠.(웃음)
라: 스트라빈스키를 재해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장미’를 보면서 단장님 스타일을 어떻게 도와드릴까만 고민했죠. 제가 단장님 팬이 된 이유가 어떤 음악에 맞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작을 보여주시기 때문인데요, 그 안에서 뭘 말씀하려는 걸까 들여다보니 바로 ‘여성성’이었어요.
안: 가장 위대한 존재가 여성이라 생각해서 제 작품은 늘 여성예찬인데, 그걸 들켜버린 거죠.(웃음) 이번엔 여성 전사의 춤이에요. 강인한 여성의 시대잖아요. 수진씨 별명을 ‘원더우먼’이라 붙였어요. 강인한 여성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 직접 춰보니 과연 여성성이 느껴지던가요.
- 최: 저희는 보통 에너지나 몸의 질감을 사용해 몸을 크게 쓰는데 이 작품은 아주 섬세해요. 손 끝 하나, 시선 처리, 호흡 같은 디테일까지 챙겨야 하죠. 음악도 굉장히 미니멀해서 한 번 놓치면 뒤가 다 뭉개지구요. 큰 무대에서 에너지로 싸우던 몸이니 익숙하진 않죠. 하지만 그런 부분이 필요하단걸 느낄 나이가 된 것 같아요. 보여지는 춤을 내려놓는 법을 알았달까. 누가 보건 말건 예민하게 호흡하고 있어요.
안: 굉장히 답답할 거예요. 수진씨같은 ‘다 자란 사자’를 다시 고요하게 만들기가 힘든데, 점점 잘 하더군요.
오고무의 요염하고 도발적인 변신
“오고무가 재밌는데 사실 좀 뻔하쟎아요. 새롭게 만들고 싶었는데 많이 바꾸면 안되니 살짝살짝 편집하고 리듬을 좀 바꿔 봤어요.”(안)
“제가 북가락 틀을 만들어드리고 그 안에서 단장님 해석으로 리듬을 빠르게 몰아갔죠. 북만 치지 말고 춤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산조 가락을 일부러 넣고 동작을 넣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북을 치는 척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죠.”(라)
아름다운 듀엣도 있다. 최수진과 성창용, 두 주역 무용수는 각각 ‘서동요’의 신라 공주와 백제 왕자다. 둘의 사랑으로 두 문화가 혼합되지만, 정작 클라이맥스는 계급 구분 없이 모두 ‘전사’가 되는 군무씬이다. “부족 시대에는 공주건 뭐건 다 전사였죠. 성골이고 진골이고 모든 계급이 나라를 위해 합심해 싸운건데,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번에 국민이 또 우리를 살렸으니, 국민을 위한 축제를 열자는 거죠. 개인적으로 ‘장미’(2009)에서 시작해 ‘단’(2012), ‘혼합’(2016)으로 이어온 굿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거예요.”(안)
“제 오리지널리티에 자신감 찾아준 작업”
- ‘댄싱9’이후 꾸준히 자기 작업을 해왔는데.
- 최: 우리나라에 좋은 무용수가 많은데 좋은 안무가를 만나면 해외에 내놔도 손색없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 제 오리지널리티를 자신있게 보여주지 못했거든요. 현대무용수들은 그런 걸 좀 올드하다고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 뭐가 모던한 건지 느꼈어요. 이런 게 오히려 나를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인데 숨기고 있었더라고요. 이 작업이 제 오리지널리티에 자신감을 찾아준거죠.(최)
- 발레와 한국무용이 결합된 안무가
혼란스럽지는 않나요. - 최: 처음엔 너무 힘들었죠. 내가 뭘 잘하고 있는지 기준이 안 생기니까요. “춤을 발레·한국무용·현대무용으로 나눠 생각하지 않고 안무의 재료로만 생각한다”는 단장님 말씀이 도움이 됐죠. 3분법을 버리고 작품을 위한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하니 편해졌어요.
안: 현대무용수들이 제 동작을 힘들어해요. 발레의 ‘업 앤 업’을 하면서 밑에 큰 쇠구슬이 달린 느낌을 억지로 만들어 놓은 거니까. 몸에 배지 않으면 힘들고, 오히려 한국무용수들이 디테일한 동작을 쉽게 하는데, 이번에 혼합이 잘 된 것 같아요.
현재 국립현대무용단 시즌 단원은 한국무용 전공자와 현대무용 전공자가 뒤섞여 매일 발레와 한국무용 호흡을 트레이닝하고 있다. 현대무용수에게 ‘호흡’이 단시일에 가능한 건 아닐 터. 그런데 최수진에게는 ‘호흡’이 또렷이 보인다. “그래서 제가 ‘황진이’라고도 부릅니다. 수진씨가 한국무용의 호흡을 하는 걸 보면서 저도 수확이 커요.”(안)
여러모로 ‘3분법 타파’를 실천하는 무대지만, 각자 전공이 뚜렷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안 단장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만나야 융합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융합이 안 되는 건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 뭉치기 때문이에요. 여기 다들 모여 있지만 각자 스페셜리스트이기에 융합될 수 있죠. 특히 몸과 목소리로 하는 순수예술은 최고의 스페셜리스트가 되야 비로소 서로 어울릴 수 있어요.”(안)
국악 분야의 ‘최고 스페셜리스트’인 악사들도 또 다른 주역으로 어우러진다. 안성수 안무작 최초로 라이브 연주를 감행하는데, 악사들이 무용수들보다 높은 단 위에서 내내 조명을 받으며 구음까지 구사하는 건 “가무악일체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제가 믿는 건 우리나라는 가무의 나라란 거예요. 음악과 무용만큼은 우리가 가장 좋은 재질을 갖고 있고, 그걸 해외에도 보여주고 싶은 게 이번 공연의 목표입니다.”(안)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