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대의 걸으며 생각하며] 박열과 아나키즘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열은 경북 문경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당대의 수재들이 모이던 경성고보(현재 경기고)에 경북도청 장학금까지 받으며 입학한다. 미래의 교사를 꿈꾸던 그의 삶은 18세 때 겪은 1919년의 3·1만세운동 이후 바뀐다. 두 달 넘게 전국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아나키스트 단체를 잇따라 만들었고 단체의 기관지 주간을 역임하면서 일왕 부자 폭살 계획을 추진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무려 22년2개월 기록적 옥살이
아무도 기억 않는 ‘잊혀진 혁명가’
자본주의·공산주의 모두 비판
‘제3의 길’ 혹은 중도파의 원조
‘아나키즘 =무정부주의’ 번역은 문제
파괴·무질서·반체제 이미지 커
요즘 ‘무강권주의’로 쓰는 추세
‘小國寡民’ 노자·장자 사상과 닮아
지난 12일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을 찾아갔다.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문경새재 톨게이트를 나와 차로 3분 정도 지나자 박열의사기념관 안내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논길 마을로 안내했다. 기념관에 전화를 걸어 안내받고 나서야 찾아갈 수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서울 쪽에서 아래로 기념관을 찾을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했다. 어쨌든 목적지에 도착한 후의 느낌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박열의 생가와 가네코의 무덤이 기념관과 함께 제법 근사하게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뭔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아나키스트와 박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낮았던 것에 비하면 2012년 10월 개관한 기념관의 외형은 비교적 잘 갖춰져 있었다. 문경시 예산 지원으로 학예사 1명을 포함해 상근 직원 3명이 빠듯하게 운영해 나가고 있었지만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열의 무덤이 없는 것이라고 할까.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돼 74년 타계한 뒤 평양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고 한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뭐라 하든 상관없다”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 성공으로 탄생한 신생 국가 소련에 당시 많은 진보적 지식인이 지지를 보내던 시절에 그 권력의 맹점을 지적했다니 놀랍다. “우리는 각자의 개체적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을 하려는 데는 끝까지 반대한다”는 조항도 주목할 만하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가 잊혀진 데는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어도 작용을 했다. 프랑스 아나키스트 프루동이 사용해 유명해진 아나키(Anarchi)라는 말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로 올라가는데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는 아나키를 ‘지도자가 없는, 장수가 없는’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에는 ‘파괴’ ‘무질서’ ‘반체제’의 이미지가 두드러졌다. 그런 연유로 요즘은 그냥 아나키즘이라고 쓰거나 굳이 번역할 경우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로 쓰는 추세다.
90세 이문창 옹 “박열은 얌전하고 침착했어요”
1927년생인 이 회장은 한국 아나키즘의 맥을 잇는 ‘국민문화연구소’를 이끌어 왔다. 그를 ‘최후의 아나키스트’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묻자 그렇지 않다고 했다. 요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에서 활동한 이회영(1867~1932)·신채호(1880~1936)·류자명(1894~1985) 선생 등이 해방 전 1세대 아나키스트이고, 자신은 해방 직후 활동한 2세대의 막내라고 했다.
국민문화연구소는 격렬한 정치투쟁이 아닌 농촌의 ‘신생활운동’에 주력해 왔지만 1960~70년대에는 그런 농촌 봉사마저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운영이 어려웠다고 한다. 단 하나의 이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아나키즘의 속성이기에 아나키즘의 스펙트럼은 넓을 수밖에 없다. 요즘의 아나키즘은 권력의 분산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이론과 환경운동 분야에서 많이 주목받고 있다.
이 회장은 ‘작은 사회’를 이야기했다. “소사회, 소집단, 부모와 형제, 늙은이와 젊은이 등이 작은 지역과 집단에서 소통하며 사는 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자꾸 거대사회를 지향하니까 인간의 자유와 생명력이 찌그러지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나키즘 연구자들은 그 기원을 서양 사상사에서 찾곤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소국과민(小國寡民: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의 노자 사상이나 권력을 조롱하는 예화가 풍부한 장자의 사상은 아나키즘과 많이 닮았다. “공을 이뤘어도 거기에 머무르지 말라(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는 노자의 말은 굳이 아나키즘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정치 권력만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영원한 동아시아의 경구로 내려오지 않았는가.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