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밀라노에 사는 한 독일계 여성이 까치와 호랑이 그림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한다. 미장원에서 막 나온듯한 긴 속눈썹과 빨간 입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커다란 두 눈, 폭신폭신해 보이는 네 발, 금방이라도 누구를 홀릴 듯 요염한 자세…. 한국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하지만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신선해 보이는 이 그림, 바로 민화(民畵)다.
밀라노, 한국 민화의 매력에 빠지다
하지만 한국 내에서는 이 용어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종종 들렸고 이름을 바꾸려는 시도도 몇 번 있었지만 결국 ‘민화’로 돌아오곤 했다.
올해 처음 민화만으로 전시, 참여 작가도 4배 늘어
7일 오후 개막식에서 만난 엄재권 한국민화협회 회장은 “작년에도 이곳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를 했는데, 민화가 산수화나 인물화 위주의 기존 동양화와는 스타일이 다르고 내용이 재미있어서 그랬는지 현지 반응이 좋았다”라며 “그래서 올해에는 독자적으로 민화만 따로 전시하자는 말이 나왔고, 작년에는 40명만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164명이 각각 한 작품씩 출품해 규모를 키웠다”고 설명했다.
넬로 타이에티(Nello Taietti) 마탈론 재단 이사장은 “이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한국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갤러리를 운영하며 한국 작가들의 그림 및 도자기 전시회를 자주 개최했다. 한국은 여러가지로 이탈리아와 비슷한 점이 많아 더 애정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재단 갤러리에서 민화전을 열게 된 이유에 대해 “작품을 파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특히 밀라노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것”이라며 “한국이란 나라를 잘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깊이 아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층과 2층 전시장 벽을 가득 메운 164점의 민화는 대부분 긴 세로 족자의 형태로 걸렸다. 모시에 그려 족자를 하지 않은 작품들은 테이블 위에 펴서 전시했다. 그림 사이즈가 제각각 달라 족자의 넓이와 길이, 배경천의 색도 서로 달랐지만, 나름대로 개성있게 연출됐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복도는 물론 전시 공간의 중앙에도 족자를 커튼처럼 늘어뜨려 되도록 많은 참여작품을 소개하려고 애쓴 갤러리측의 배려도 돋보였다.
전통적인 민화의 스타일을 고집한 작품은 물론, 수묵화 기법을 가미해 담담하고 세련되게 단순화시킨 작품,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사물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작품, 동화책의 일러스트레이션처럼 귀여운 작품들도 적절히 섞어 놓았다. 서양화처럼 원근감을 표현하지 않고 모든 정물을 같은 크기로 겹쳐 표현한 문방도(文房圖)는 마치 네덜란드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서양 그림의 기본틀을 벗어나는 민화의 구성이 화려한 색채와 어울려 오히려 모던하게 느껴진다”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상징 문양들은 그 자체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현지인들은 입을 모았다.
해당 작품과 카탈로그 설명을 일일이 비교해가며 뜻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도 많았다. 자신을 카밀로라고 소개한 이탈리아 건축가는 책과 주변 물건들을 화려하게 그린 문방도(文房圖)를 가리키며 “전통적인 동양의 그림에서 보기 힘든 직선, 서양화에서 주로 사용한 원근법의 사용 대신 채도를 낮게 표현한 점 등이 기존 아시아의 동양화와 달라보여서 그런지 나에겐 매우 현대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문자와 그림을 결합한 문자도(文字圖) 앞에서는 “상징적 그림으로 표현한 한자도 굉장히 신선해 동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인다. 매우 흥미롭다”고 감탄했다.
정신수양의 방법에서 자신만의 예술로 승화
한국 민화가 이탈리아, 아니 유럽의 수집가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넬로 타이에티 회장은 우선 두루마리 형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유럽에서는 두루마리를 흔히 ‘중국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방식은 영구적이지 않고 고객들이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액자에 넣어 가치를 높인 작품을 좋아한다. 종이에 그린 그림이라도 액자에 걸면 훨씬 품위가 있고 판매도 가능해진다. 모든 작품을 액자에 넣어 가져오긴 어렵겠지만 몇 점이라도 액자에 넣어 전시한다면 전체적인 격이 올라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또 “이 같은 전시는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에 오프닝 시 참여 작가들이 한복을 입거나 한식 다과를 준비하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이곳 사람들은 작가들이 발표하는 작품을 보고 해당 나라를 이해하기 때문에 참여 작가들은 문화 외교관으로서 큰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엄 회장은 “작품 수가 많다 보니 차근차근 보면 각기 다른 그림들일지라도 외국인들에게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며 “향후 전시는 액자 활용을 포함해 디스플레이와 큐레이션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
밀라노(이탈리아) 글·사진 김성희 중앙SUNDAY S매거진 유럽통신원sungheegioielli@gmail.com, 사진 한국민화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