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뜨는 닷컴의 고향
글로벌 스타트업의 메카는 단연 미국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다. 전 세계 창업 붐이 시작된 곳일뿐더러 페이스북·구글·우버 같은 혁신적 기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국에서 실리콘밸리와 비견해 볼 수 있는 곳은 강남이다. 1994년 게임업체 넥슨을 시작으로 엔씨소프트·다음커뮤니케이션 등 1세대 게임·IT 기업이 모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97년 창업한 네이버의 보금자리 또한 역삼동 아주빌딩의 ‘서울벤처타워’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 6월 서울벤처타워는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강남의 스타트업들은 갈수록 높아지는 임대료 탓에 상암동·구로·판교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2호선 삼성~강남역 3.5㎞ 밀집
투자자 등 창업 생태계 풍성
2000년대 초반 닷컴 열풍 부활
스타트업 겨냥한 공유 오피스에
정주영 손녀, 김승연 차남도 진출
오너 3세도 잇따라 강남에 창업센터 개설
대기업 오너 3세들도 서울 강남권역을 근거지로 삼아 스타트업 육성에 나섰다. 서울 논현동 ‘드림플러스 신사센터’는 김동원(32) 한화생명 상무가 설립을 주도했다. 김 상무는 김승연 회장의 차남이다. 지하 3층, 지상 4층 규모의 드림플러스에는 현재 IT·전자상거래·핀테크 등 스타트업 8곳이 입주해 있다. 김 상무는 향후 한화생명 등 금융계열사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핀테크 분야를 직접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손자·손녀도 창업가 육성에 뛰어들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의 장녀 남이(32)씨는 아산나눔재단 사무국장을 맡아 마루180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2014년 설립돼 개관 3주년을 맞은 마루180을 거쳐간 스타트업은 현재 총 86곳이다. 마루180에서는 스타트업 관련 세미나와 네트워킹 행사도 자주 열린다. 플리토(번역 플랫폼)·드라마앤컴퍼니(명함관리 앱)·피스컬노트(법률 분석 플랫폼) 등 마루180에 입주한 스타트업들은 지금까지 투자금으로 740억원을 유치하고 213명의 일자리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정 국장은 “할아버지는 기업가이자 70년대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사회혁신가이기도 하다”며 “성장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역경을 뚫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업가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장남 경선씨도 2014년부터 서울 성수동 서울숲에 ‘루트임팩트’를 차리고 20개 소셜벤처 업체를 입주시켰다. 성수동은 성수대교를 건너면 압구정동과 바로 연결된다. 실질적인 강남 생활권에 속하는 셈이다.
벤처 1세대 돌아오며 인큐베이터 역할
2015년 중기청이 팁스타운을 역삼동에 만든 이유도 스타트업 지원 기관이 이미 강남 일대에 스스로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윤종영 팁스타운 센터장은 “강남에는 스타트업 기업들이 만나야 할 투자자들이 있고 아이디어가 있다”며 “액셀러레이터 같은 민간 스타트업 플레이어들이 클러스터 형태로 모여 있어 협업이 매우 수월하다”고 말했다. 선릉역 바로 옆에는 호창성 대표가 이끄는 더벤처스가 위치해 있다. 네오위즈 창업자인 장병규 파트너가 속한 벤처캐피털 ‘본엔젤스’, 문규학 대표의 ‘소프트뱅크벤처스’가 서울 논현역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은 “닷컴 시기만 하더라도 액셀러레이터 개념이 없던 때라 회사 스스로 생존해야 했지만 이제는 창업 1세대들이 벤처캐피털로 강남에 돌아왔다”며 “스타트업과 투자자의 네트워크가 살아 있다는 점에서 한국형이 아닌 미국 실리콘밸리 원형에 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강남 일대에 스타트업 클러스터가 만들어지자 대기업도 가세하기 시작했다. 첨단기술 분야에 별 관련이 없어 보였던 롯데그룹도 지난해 4월 자본금 300억원을 투입해 ‘롯데액셀러레이터’를 세웠다. 스튜디오블랙을 만든 현대카드도 후발 주자 가운데 하나다.
강남 지역 스타트업의 증가 추세는 통계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12일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강남구에 위치한 벤처기업은 1517개(지난해 말 기준)로 전년 대비 91개 증가했다. 강남구를 제외한 나머지 24개 서울자치구는 같은 기간 평균 17개 증가한 데 그쳤다. 판교가 위치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경우 54개 증가했다. 윤종영 센터장은 “강남은 기업과 액셀러레이터, 벤처캐피털이 자연스럽게 모인 곳이라면 판교는 일종의 계획도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남이 스타트업 클러스터라면 판교는 성공한 벤처기업들이 주로 모인다는 것이다.
판교는 성장한 기업 텃밭, 상암은 활기 잃어
스타트업 창업자 가운데 대다수인 20~30대가 문화생활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도 강남만의 강점이다. 한 벤처업계 관계자는 “강남역을 중심으로 젊음의 문화가 형성돼 있어 여가 시간을 보내기 좋고, 싸이 ‘강남스타일’ 덕분에 외국에 설명하기도 편해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한국스타트업생태계포럼(KSEF)이 발표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백서’에 따르면 회사 소재지로는 서울 강남구(39%)가 가장 많았고, 경기도 성남시(22%)가 뒤를 이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 구글캠퍼스 서울, K-ICT 본투글로벌센터,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이 참여해 발족한 KSEF는 295개 스타트업 CEO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백서 편집자인 백상훈 경성대 교수는 “강남에선 매년 3000여 건 이상의 스타트업 관련 이벤트가 열리고 한국의 벤처캐피털 사무실 81%가 강남에 있다”며 “스타트업 성장에 필요한 요소를 공급하는 최적의 장소”라고 설명했다.
반면 국책사업으로 스타트업 단지를 육성하려 했던 서울 마포구 상암동 일대는 활력을 잃고 있다. 같은 설문에서 스타트업이 현재 마포구에 입주해 있다는 답변은 5.1%에 그쳤다. 서울시가 1900억원을 들여 지난해 준공한 ‘S플렉스센터’는 공실률이 69%로 집계됐다. 임정욱 센터장은 “상암동 같은 경우에는 일단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지 못해 관련자들이 왕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며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한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불리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상암디지털단지의 상징이었던 팬택 본사는 지난달 1500억원에 가구업체 한샘에 매각됐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