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의 자연사 이야기] 인류世와 닭뼈
멸종(滅種)이라는 단어는 왠지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무서운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멸종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삶의 터전을 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멸종이다. 멸종의 결과는 진화다.
산업혁명 후 인류 생물량 급증
척추생물 중 인류 32% 가축 65%
스스로 지구 망치는 인류세 열려
500~1만 년 지속 후 대멸종 예상
동위원소·플라스틱도 명확한 흔적
신생대는 공룡이 멸종한 후에야 시작됐다. 그 전까지는 생쥐만한 크기로 머물면서 캄캄한 밤중에나 겨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포유류가 기를 펴고 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이다.
멸종에 멸종을 거듭한 생명
하지만 생명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다. 멸종에 멸종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던 찬란했던 자연이 어느 한순간에 황폐화돼 생명들을 모조리 몰아낸다. 우리는 그 사건을 대멸종이라고 부른다.
이후에도 대멸종은 두 차례 더 있었다. 2억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말 때 생물종의 80% 그리고 6600만 년 전 백악기 말 대멸종 때는 전체 생물종의 70%가 사라지고 신생대가 시작되었다.
인류의 탄생도 이전의 대멸종에 기인
멸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대멸종은 급격히 변화한 자연환경에 맞선 생명의 혁신적 창조과정이다. 따라서 우리가 슬퍼할 일은 하나도 없다. 덕분에 우리 인류가 등장했으니 말이다.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은 우리 인류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사건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를 신생대 제4기 홀로세라고 한다. 지금부터 약 1만 2000년 전이 그 시작점이다. 홀로세는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황당한 시대다. 홀로세가 시작하기 전까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지구 환경에 적응해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환경에 적응하는 대신 환경을 제멋대로 바꾸는 생명이 등장했다.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현생인류는 농사를 짓겠다고 멀쩡한 들판에 불을 지르고 물길을 돌렸다. 남아메리카에 진입하자마자 수백만 년 동안 그 땅에 살던 거대 포유류를 멸종시켰다. 드디어 지질시대를 나누는 데 인류가 기여를 한 것이다.
인류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있으니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농경과 목축은 나름대로 환경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농사 덕분에 인구수가 늘어났어도 지구 환경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지질시대가 도래하고야 말았다. 2000년 네덜란드 대기화학자 파울 요제프 크뤼천(Paul Jozef Crutzen, 1995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제안했다. 인류세는 홀로세의 끝부분에 해당한다. 인류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이미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원인이 우리 인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류세의 가장 큰 문제는 인류의 생물량이다. 인류의 생물량 증가 곡선의 기울기는 일정했다. 1769년에는 기껏해야 5억 명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부터 곡선의 기울기가 조금 가팔라지고 1869년 석유를 사용하면서 더 가팔라지더니 1950년을 기점으로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직적으로 증가했다. 결국 인류의 생물량은 화석에너지 사용량과 비례하여 증가한 것이다. 이제는 75억 명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인류세는 언제 시작했다고 봐야 할까? 여기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첫째는 홀로세 자체를 인류세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미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인류세를 이렇게 정의하면 우리 현대인의 책임이 너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는 산업혁명기 그러니까 대략 1750년대 인류세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인류의 급격한 증가의 직접적인 원인이고, 또 이때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멸종속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층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는 조금 더 현대인에게서 책임 있는 시점을 찾았다. 제2차 대전 이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질학적 변화가 지구에 생겨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홀로세 시작점과 현대를 비교하면 생물상도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지표 화석은 무엇이 있을까? 약 1만 년 전에는 새를 포함한 육상 척추생물량 가운데 야생동물이 99.9%를 차지하고 인간과 가축은 0.1%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야생동물은 단 3%에 블과하고 인류가 32% 그리고 가축이 65%의 생물량을 차지한다.
대멸종 땐 인류와 같은 최대 포식자 사라져
인류세는 앞으로 500년~1만 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길어봤자 1만 년이 지나면 여섯 번째 대멸종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여섯 번째 대멸종에서도 누군가는 살아남을 것이다. 지난 다섯 번의 대멸종은 당시 최고 포식자는 반드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금 인류세의 최고 포식자는 인류다. 인류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인류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연과 우주에게도 큰 슬픔이다. 우리 인류는 조금이라도 더 지속가능한 방법을 찾고 실천해야 한다.
비타민 D 합성하며 닭 대량 생산
그런데 인류세의 표준 생물이 된 닭(Gallus gallus) 역시 일찌감치 가금(家禽)이 됐다. 사람이 닭을 키우기 시작한 때는 대략 1만 년 전. 신석기인들이 보기에 닭의 가장 큰 장점은 잘 날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달걀을 먹기 위해 닭을 키웠다. 특별한 날이면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는 늙은 암탉이나 알파 수탉이 아닌 여분의 수탉을 잡아먹었을 뿐이다.
닭이 대규모로 사육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인류세 시작점과 일치한다. 이때 부화장이 마련되고 엄청난 양의 곡물이 먹이로 제공되고, 백신과 항생제가 생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타민 D. 모든 동물은 햇빛을 쬐어야만 비타민 D를 합성할 수 있다. (햇빛이 부족한 유럽의 정부들은 유아들에게 비타민 D를 무상으로 공급한다.) 비타민 D를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게 되자 닭을 좁은 실내에서 대량으로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5000만 명의 한국인이 매년 먹는 닭의 수는 대략 10억 마리에 이른다.
서울 시립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