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통령 구속 이후 수사·재판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됐던 지난달 30일 검사 출신 한 변호사에게 영장 발부 여부에 대해 묻자 돌아온 답이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의 신조어처럼 영장 발부는 정해진 수순이라는 의미다. 박 전 대통령 지시를 따른 공직자들을 포함해 관련자 상당수가 이미 구속된 상태에서 주범 격인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영장이 기각될 가능성은 작았기 때문이다.
영장 발부가 유죄 의미는 아니야
검찰 보강 증거 확보에 수사 집중
朴, 재판 대비 변호인단 바꿀 수도
유영하 변호사 영치품으로 책 전달
점심은 김치찌개, 저녁은 순두붓국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판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주요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상당성이 인정됨”이라는 사유를 밝혔다. 50자가 채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고 통상적으로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할 때 제시하는 사유들이지만 법관의 판단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있다.
전문가들은 ‘주요 혐의’라는 표현에 무게를 둔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영장청구서에 뇌물수수 등 13가지 혐의를 모두 적시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중 주요 혐의에 대해서만 소명된다고 봤다. 수도권 법원에서 영장전담을 경험한 한 법관의 설명이다.
“영장청구서에 기재된 혐의가 많을 때는 일단 전부 검토를 한다. 그중 일부만으로도 사안이 중대하고 범죄의 소명이 된다고 판단되면 영장을 발부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정이 안 되는 혐의를 삭제하지는 않는다. 본안 재판부에 불필요한 선입견을 줄 수 있고 심증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혐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와 같은 고심의 결과로 추정할 수 있다.”
일각선 “증거인멸 우려 없는 데 영장”
일각에선 법리적으로는 무리한 결론이란 평가도 한다. 검사 출신인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지적이다.
“구속 요건만 놓고 보자면 이번 영장 발부 결정엔 무리가 있다. 발부 사유로 증거인멸 우려를 언급했다. 법리적으로 증거인멸이란 수사기관·법원의 실체적 진실 발견을 어렵게 할 구체적 위험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검찰이 이미 최순실씨와의 공범 증거가 ‘차고 넘칠 정도로 있다’고 말했다. 또 뇌물공여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증거가 충분하다고 해서 구속 기소됐다. 그렇다면 박 전 대통령의 증거인멸 우려는 없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이번 영장 발부는 법원이 여론의 거센 압박을 무시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대선 선거운동 시작 전 수사 마무리
검찰 특수본은 구속 이틀째인 1일에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론 다음주 초 정도에 조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주말 동안엔 관련 혐의 사실에 대한 참고인 조사 등을 진행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 등 언론에 공개할 정도의 주요 소환자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향후 검찰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한 보강 증거를 확보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대하지만 입증은 제일 까다로운 혐의다. 형사사건을 주로 해 온 변호사들 사이에선 검찰과 특검이 구성한 박 전 대통령 뇌물수수 혐의와 관련해 ‘신종 범죄’라는 말도 나온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관계가 기존의 법논리, 판례와 법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금품을 직접 받지 않은 박 전 대통령을 뇌물죄로 의율하기 위해선 최씨가 가족 이상으로 가까웠던 주변 정황을 더 촘촘하고 정교하게 구성해야 된다.
정주백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영장이 발부된 만큼 이미 검찰의 기본적인 수사는 끝났다고 본다. 이 상황에서 검찰이 무혐의 결정을 할 일은 없고 구속 기소는 정해진 수순이다. 이와 함께 재판에서 무죄가 나오면 역풍이 클 거란 점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검찰로선 기존의 공소 사실을 입증할 보강 증거를 모으는 데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朴 지지자들 “제2의 10·26사태”
월드피스자유연합·구국국민연대 등은 박 전 대통령이 수감된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84조 조문이 적힌 옷을 입고 구치소 정문까지 행진했다. 이들은 구치소 정문을 향해 절을 하기도 했다.
구치소 생활 이틀째를 맞은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식빵과 수프, 채소 샐러드 등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법무부 교정본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서울구치소 수용자 4월 부식물 차림표’에 따르면 점심엔 돈육김치찌개가, 저녁엔 순두붓국이 제공됐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는 지난달 31일에 이어 이날도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오전 10시40분쯤 도착해 구치소로 들어갔다가 12분 만에 나왔다. 영치품으로 책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치소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취재진이 막아섰지만 차량 문을 닫은 채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법조계에선 박 전 대통령이 변호인단을 바꾸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그간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부터 이번 영장실질심사에 이르기까지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이 기대 이하의 대응을 보였다는 평가가 많다. 탄핵심판 과정에선 법리 논쟁보다 인신 공격과 돌출성 발언으로 재판부를 자극하는 데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달 21일 검찰 소환 조사 땐 변호인단의 손범규 변호사가 취재진에게 “악의적 오보, 선동적 과장 등이 물러가고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을 봤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신 검사님들과 검찰 가족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오해의 소지가 될 만한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법원장 출신 한 변호사의 평가다.
“애초에 전략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나가서 적극 해명하는 전략을 취했다면 박 전 대통령 구속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인정할 건 인정했어야 했다. 끝까지 부인하고 조사에도 응하지 않다 보니 헌재에서 헌법 수호의지가 없다는 평가까지 나온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주장에도 수긍할 만한 설명들이 꽤 있다. 하지만 변호인들이 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본다. 수사·재판 실무에 오랫동안 참여하지 않았던 변호사들이 변론을 주도하면서 생긴 일일 수 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