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뻔하지 않을까 싶지만, 출생의 비밀 등 기상천외한 설정을 더해 참신하고 흥미진진한 무대로 거듭났다. 안호상 국립극장장은 “올해 신작 중 가장 비중을 둔 작품”이라며 “전통 현대화의 사명을 가진 국립극장이 컨템포러리 극장으로 거듭나기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창극 영스타 5인방
이광복·최호성·최용석·김준수·유태평양
몇 해 전 판소리 ‘억척가’를 준비중인 이자람을 만났을 때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도밍고와 파바로티는 구별되는데 전통에 갇힌 판소리는 누가 해도 똑같다. 경쟁력을 가지려면 달라야 한다”는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지난달 22일 국립창극단 연습실 풍경은 사뭇 달랐다. 직접 북장단을 치고 어깨춤도 추며 총지휘하는 이자람 음악감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릎을 쳤다. 흥보·놀보뿐만 아니라 원님·마당쇠·제비가 골고루 내는 소리들이 눈감고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개성적으로 들려온 것이다. 몇 년새 국립창극단이 벌려 놓은 큰 판에서 젊은 소리꾼들은 저마다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었다.
“판소리한다고 하면 피 토해봤냐 묻는데, 피 토하면 죽죠(웃음). 똑같이 걸죽한 목소리로 ‘제비 몰러 나간다’만 하는 줄 알지만 소리하는 사람도 다 성음이 달라요. 저나 준수는 타고난 미성이고, 호성이처럼 탁성으로 호걸스런 사람도 있죠.” (이광복, 이하 ‘광’)
“옛날엔 도제식이라 스승과 똑같은 소리를 내야 했지만 요즘엔 다양해지는 분위기예요. 선생님들도 개인의 소리 특색을 분별해주시고, 각자 색깔을 만들게 도와주시죠. 그래서 요즘 소리꾼들은 개성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최용석, 이하 ‘용’)
- 각자 원작과는 캐릭터 성격이 달라졌죠.
- 최호성(이하 ‘호’): 아무리 각색해도 교훈 자체가 권선징악·인과응보인지라 크게 바뀐 건 없어요. 놀보는 치밀하고 계산적인 악질이 아니라 빈구석이 있어서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죠.
김준수(이하 ‘김’): 흥보는 겉보기엔 좀 ‘또라이’ 같죠.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예수님·부처님처럼 다 퍼주는데, 불교·기독교·우주의 기운까지 아우르는 건 이유가 있어요. 원작엔 그저 명당자리 받고 박 타서 부자가 되지만, 우리는 좀 현실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표현하려는 거죠.
호: 연출님과 같이 술 한 잔 하다보니 엄청난 사랑 예찬론자세요. 결국 모든 종교가 얘기하는 게 사랑이쟎아요. 그걸 말하고 싶은 거 같아요.
용: 마당쇠는 원래 놀보 곁에서 흥보를 걱정해주는 캐릭터인데 여기선 놀보처럼 물들어요. 놀보를 너무 잘 알아서 놀보가 흥보 때릴 생각하면 먼저 몽둥이를 갖다 주는 식이죠. 맘 속으론 흥부편이지만 못된 주인 비위 맞추다 보니 영악해진 건데,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랄까요.
광: 원님도 원작에는 그저 박 쪼개고 나와 놀보를 혼내주는데, 저희는 ‘특검 원님’으로 설정했어요. 남들은 다 아는데 본인들만 잡아떼는 국정농단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특검처럼, 원님도 놀보가 결국 자기 입으로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게 하는 역할이죠.
유태평양(이하 ‘평’): 제비가 은혜를 갚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바뀝니다. 새가 아니라 유부녀를 홀리는 ‘강남제비’가 됐거든요. 유부녀 남편한테 ‘가운데 다리’가 요절나는 거죠.
- ‘강남제비’가 가장 궁금한데요.
- 광: 정말 씬스틸러에요. 원래 에로배우 수준으로 야하게 연기했는데, 연출님이 ‘몇세 관람가냐’면서 자르셨죠.(웃음)
용: 짧고 굵고 생색나는 부러운 역할이에요. 춤 솜씨도 돋보이죠. 깨알재미 몸 동작이 기가 막혀요.
평: 춤도 좀 잘렸어요.(웃음) 근데 너무 기대하셔서 부담스러워요. 재밌는 장면을 제가 그 만큼 살려야 하는데.(한숨)
용: 사실 제비를 저희 둘 갖고 고민하셨거든요. 원래 리딩은 평양이가 마당쇠를 했고, 저도 몸쓰는 걸 좋아해서 제비도 자신 있었는데 연습 과정에서 바뀌었죠. 평양이가 제비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웃음)
“남창 듀엣으로 ‘브로맨스’ 코드도”
- 브로맨스 코드가 정말 있나요.
- 준: 등장부터 강렬한 듀엣이 있어요. 보통 창극에선 남자끼리 듀엣이 없거든요. 방자와 이도령 정도고 거의 없는데, 우리는 파트너가 계속 바뀌면서 듀엣으로 거의 다 만나게 되요.
호: 극보다 일상에 있죠. 준수와는 입단동기라 정이 가긴 해요. 애가 여성스러워서 ‘자기 왔어?’ 이러면서 깐죽거리면 확 때려주고 싶죠.(웃음)
준: 부부 역할을 할 정도로 형과 인연이 많거든요. 제 나름의 애정 표현을 하는건데, 오히려 형이 부끄럼이 많아요.
호: 친동생 같아서 제가 잘 해주죠. 놀보가 흥보 때릴 때도 조심스레 때립니다. 이런 미담 좀 강하게 어필해라.(웃음)
남자 캐릭터들을 부각시키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배우들 역할은 축소된 느낌이지만, 기획 자체가 “남자 이야기를 해보자”였다. ‘변강쇠 점찍고 옹녀’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들’ 등, 최근 창극단이 너무 여인 이야기만 해왔기 때문이다. ‘소리 잘하는 남자들은 다 여기 있다’는 걸 부각시키자는 의도다. “저도 남자지만 남자소리의 매력이 분명히 있어요. 극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에 눈대목들을 최대한 살린 것도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죠. 남자소리의 매력도 봐주셨으면 좋겠어요.”(호)
“몸은 힘들어도 공연 잘 되니 힘나”
이자람의 음악에 대해서도 “고선웅 극 스타일이 있다면 이자람 음악 스타일도 있다”(준)며 “판소리를 존중하면서도 개성적인 음악을 기대하라”(용)고 했다. “너무 파격적인 작품은 하면서도 기분이 좀 그런데, 소리 자체를 존중해서 만드니까 관객도 정통 판소리로 듣게 될 것 같아요.”(호)
22세에 처음 창극단에 들어와 객원·인턴·계약직을 거쳐 30세 되던 2013년, 10년 만에 치러진 신입단원 공채를 통해 비로소 정단원이 됐다는 이광복은 창극단의 최근 변화를 가장 실감하고 있다. “예전엔 어려운 선생님들이 많고 선후배관계도 엄격했죠. 소리에 대한 자부심은 강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었어요. 시즌제 시작되고 작품 수가 많아지니 젊은 피가 수혈돼 창작극도 활발해지고, 자연히 관객층도 젊어지는 것 같아요.”(광)
- 창극이 이렇게 관심받을지 알았나요.
- 평: 이제 관객중 80%는 일반인들인데, 기획과 홍보가 그만큼 중요한 것 같아요. 전에는 창극이 심청가·춘향가 같은 정해진 작품만 있어서 국악인들이 공부를 위해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데이트코스로 또 대중문화로 즐기게 된 것 같아요.
용: 요즘엔 버스나 육교에도 우리 얼굴이 붙어있어 놀라곤 해요. 그만큼 사람들 삶에 스며들기 시작한 거죠.
평: 소위 뮤지컬계 누가 떴다 하면 그 사람 보러 우르르 가는데 창극에도 이게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지 않나 해요. 실제로 지금도 캐스팅표 보고 예매를 한다니, 관객 시선이 달라지고 있는 거죠.
호: 최근 SNS를 시작했는데 모르는 분들이 친구신청을 하길래 보니까 팬들이시더라고요. 소리꾼으로서 이렇게 관심 가져주시니 참 행복해요. ‘흥보씨’ 끝나고 바로 ‘옹녀’‘코카서스의 백묵원’이 이어지는데, 몸은 힘들어도 공연이 잘 되니 힘이 납니다.
- 소리꾼이니 완창 욕심도 있겠죠.
- 준: 소리공부의 결실을 맺으려면 해야죠. 언젠간 해야지 하다가 영영 못할 것 같아서 무작정 춘향가를 하기로 하고 10월에 대관을 해놨어요.
용: 요즘엔 완창보다 눈대목 5, 6개를 독주회 개념으로 발표하는 게 트렌드죠. 5번이나 완창을 해본 평양이가 부럽긴 해요.
광: 도전해야죠. 김성녀 감독님도 완창을 권하시고, 몇 년내 완창은 다들 한번씩 하게 될 것 같아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국립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