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수첩에 있어요. 나는 상복 안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들을 모두 꺼냈다. 사망진단서와 화장시설 사용허가증과 돈을 넣어둔 봉투 등은 모두 그대로 있었지만 수첩은 없었다. 몇 번이나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모르시는 말씀.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수첩 정부였는데. 대통령도 ‘수첩공주’라고 불릴 정도로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했고 장관도 수석들도 수첩에 뭔가를 빼곡하게 받아 적었는데. 결국 수첩에 적힌 그 글자들이 자신들을 파면 시키고 구속 시켰지만.
밀로라도 파비치의 소설 『하자르 사전』에는 수첩공주는 아니지만 글자 때문에 죽은 공주 이야기가 나온다. 아테 공주는 항상 잠자리에 들기 전 양쪽 눈꺼풀 위에 하나씩 글자를 써두었다. 장님이 쓴 그 글자들은 적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든 그 글자를 읽으면 즉사했다. 하루는 공주의 시종들이 공주를 기쁘게 하려고 거울 두 개를 선물했다. 빠른 거울과 느린 거울. 빠른 거울에는 미래가 비쳤고 느린 거울에는 과거가 보였다. 어느 이른 봄날 아침 공주는 잠에서 깨어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고 순식간, 그러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자신의 눈꺼풀 위에 적힌 두 글자가 거울에 비쳤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써둔 글자가 과거와 미래에서 동시에 날아와 공주를 해친 것이다.
나는 그날 내 동선을 되짚어 따라가며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수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윤기 선생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이미 한번 찾았던 곳에 그 물건이 있는 것이라면 낭패라고 했다. 나는 지나쳐 온 곳들을 다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이제 2층 대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수첩을 찾는다. 장례 지도사, 운구차량 기사, 친척들, 심지어 다른 집 상주와 유족들까지 나서서 내 수첩을 찾느라 분주하다.
아내가 내게 물었다. 대체 수첩에 뭐가 적혀 있는데? 아버지 생신. 봉안함에 아버지 생일을 적어야 하는데 기억이 안 나. 음력 8월 23일이잖아. 맞다. 이제 됐습니다. 수첩을 찾았나요? 아뇨, 아버님 생일을 알았으니 됐습니다. 수첩에 중요한 게 있다면서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미 잃어버린걸요.
끝내 수첩은 찾지 못했다. 잃어버리지 않은 물건을 찾을 수는 없으니까. 탈상제를 치르고 상복을 반납하고 원래 내 옷으로 갈아입을 때 나는 내 재킷 안 주머니에 들어있는 수첩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상복 안 주머니에는 수첩이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장례식장을 떠나기 전 장례 지도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장례 지도사는 내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한 다음 수첩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해요? 수첩을 잃어버려서…. 혹시 나중에라도 찾게 되면 연락을 드릴 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안주머니에 들어있는 수첩에 대해서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정말 중요한 걸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
김상득 :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